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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는 편지 0928]

사역의 판별식

‘사역’이라는 말은 사실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아마 군대와 교회 외에서는 별로 들을 일이 없는 단어일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을 사역이라고 부르다보니 이 단어 자체가 가지는 독특한 어감에 대해 무뎌진 것 같기도 합니다.

의외로 가장 익숙하게 사역이라는 단어를 쓰는 곳은 영어수업입니다. 학창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신다면 ‘사역’이라는 말이 기억나실 겁니다. 설마? 라고 생각하시는 그것 맞습니다. 사역동사입니다.

사역동사는 주어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움직이는 동사들입니다. 해석한다면 ‘OO가 OO하게 하다.’, ‘OO가 OO하도록 시키다.’ 쯤이 되겠지요. 교회에서 하는 일을 사역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일이라서 내가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신 일을 한다는 고백이 이 두 글자에 스며있습니다.

코로나19와 함께 교회가 하는 일도 많이 변했습니다. 기존에 하던 일 중 어떤 것들은 중단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형태가 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들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함께공동체도 2020년에 이런 저런 사역들을 새로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없던 일을 새로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이 일이 하나님이 시키실만한 일인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가?’입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꿈과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그거 해라’ 하고 말씀해주신다면 딱 좋겠는데, 그런 식으로 일을 하려면 아마 1년에 한 가지 일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학에 ‘판별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방정식의 답을 찾기 전에 일단 답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 볼 수 있는 식이죠. 이 식에 주어진 숫자들을 넣어봤을 때, 양수(+)가 나오면 답이 있는 것이고, 음수(-)가 나오면 답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 판단해보는 판별식을 만들어봤습니다.

D = b^2-4ac

- b 필요성. 해야 하는 일인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의미의 평가 기준은 성경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성경에 드러난 교회의 5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예배, 봉사, 전도, 친교, 교육입니다.
- a 비용. 들어가는 시간과 재정, 노력의 크기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 c 가능성.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가능해야 합니다. 가능성은 실현가능성과 지속가능성의 합으로 하면 좋겠네요.

사실 그냥 장난으로 만들어본 식입니다. 어쨌든 새로운 일들을 시작할 때면 늘 이런 가치들을 생각해봅니다.

가재는 게 편이고, 가을은 개편입니다. 함께공동체의 온라인 사역도 10월부터 가을 개편을 준비합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하고, 기존의 것을 바꾸기도 합니다. 부디, 이 일들이 D>0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정도

* 가을 개편으로 오늘이 일간으로 보내드린 [함께 나누는 편지]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10월부터는 매주 1회 교회의 소식과 좋은 글들을 카톡으로 보내드리는 새로운 편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함께 나누는 편지]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0925 함께 나누는 편지]

“백발노인"

직장생활을 하던 10여년 전에 독일어를 다시 배우고 싶었다.
고등학교 3년 과정과 대학교 1학년 때 배운 독일어를 다시 배우고 싶은 이유는 단지 독일이 좋아서였다. 다 늦게 학원을 다니기도 마땅치 않고 자습할 자신은 더욱 없고 하던 차에 직장 후배의 소개로 대학교 독문과 교수로 은퇴하신 교수님을 알게 되었다. 마침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라 부담 없이 일주일에 두 번씩 퇴근 후 개인교습을 시작하였다.
맨 처음에는 흥미 있던 독일어 공부가 점차 부담스러운 일과가 되었다. 독일어 교수님답게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50분 수업에 10분 쉬고 2교시로 또 50분 수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작은 접이식 이동탁자를 사이에 두고 교수님과 단 둘이 매주 이틀 간 2시간씩 하는 공부는 점점 고문으로 다가왔다. 마침 국정감사 계절이 돌아와서 국감 준비로 한 달만 방학을 하자고 제안 드리고 허락을 받았다.
국정감사가 끝났지만 다시 교수님 댁을 찾아가지 않았다. 아무 연락도 드리지 않고 그렇게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며칠 전 출근하는 길에 아파트 단지에서 사모님의 부축을 받으시고 아침 산책을 하시는 교수님을 얼핏 보았다. 많이 늙으셨다. 내 머리카락 색깔도 하얗지만 교수님의 머리카락은 하연 것은 물론이고 숱이 많이 줄으셨다.
외모도 10여 년 전의 꼿꼿한 자세는 사라지고 꾸부정한 자세로 사모님의 어깨에 기대어 산책하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인사도 없이 독일어 교습을 중단한 나의 무례함과 이웃에 사시는 그분께 한번도 인사 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몹시도 괴로운 며칠을 보냈다. 다음 주가 추석 명절이다. 코로나 덕분에 부모님과 친지를 만나는 시간이 절약된 만큼 모처럼 큰 맘 먹고 인사 한번 가야겠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다.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이사야 46:4)

(황태연)

[0924 함께 나누는 편지]

“사랑하면..”

방탄 맴버들 각자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은 ?
방탄 7명이 모이게 된 사연들은?
방탄 맴버들 각자의 취미는?
BT21은?
방탄 맴버들이 가수가 된 계기는?
방탄 맴버 각자의 성격은?
방탄 계약 기간이 끝나면 뭐 할 거 같은지
방탄맴버 중 신랑감을 고르라면?

위 질문들에 대해 몇 개나 대답을 하셨나요? 위 질문들을 비롯해 가수 BTS에 관련된 질문을 매일 잠자기 전 침대에서 BTS 왕 팬인 중학교1학년 저희 큰딸에게 해야 하는 질문들 입니다. 처음에는 맴버 숫자, 맴버 이름, 노래제목 등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서 맴버들의 사소한 내용까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라도 BTS 이야기를 하지 않은 날이 없고, BTS 관련된 영상들은 다 봐야 하고, 관련된 제품들은 모두 사고 싶어 하는 큰딸입니다. 심지어 잠이 그렇게 많은 아이가 매주 수요일 밤 11시에 방탄소년단의 일상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꼭 보기도 합니다. 어제(9/23) 방탄소년단 영화인 “브레이크 더 사일런스 : 더 무비”가 개봉을 했죠. 영화 예약을 이미 해 놓았습니다. 음료수도 방탄소년단이 선전하는 사이다만 마시고 빈 병은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놓고 있습니다.
어제는 한참 일하고 있는데 아내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퇴근하면서 아이스크림을 사올 수 있냐구요. 갑자기 무슨 아이스크림이냐고 했더니 베스킨라빈스에서 방탄소년단관련 아이스크림이 한정판으로 나왔는데 그걸 꼭 먹고 싶다는 거를 엄마에게 부탁해서 저한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요즘 우리 딸 아이의 모든 관심과 사랑은 온통 방탄소년단에게 가 있습니다. 사랑에 푹~~빠진 거죠. 사랑에 빠지면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고 알고 싶어지게 마련이죠.
방탄을 좋아하는 딸아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떠올랐습니다. 독생자를 주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알고자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물어보시는 것 같습니다.
“너도 나를 사랑하니?”

(천재성)

[0923 함께 나누는 편지]

“시편 114편”

1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야곱의 집이 다른 언어를 쓰는 백성들로부터 나왔을 때,
2 유다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3 바다가 보고 도망갔으며, 요단 강이 뒤로 물러섰습니다.
4 산들이 숫양같이 뛰었고, 언덕들은 어린 양처럼 뛰었습니다.
5 바다야, 왜 네가 도망갔으며, 요단 강아, 왜 네가 물러섰느냐?
6 너희 산들아, 왜 네가 숫양처럼 뛰었으며, 너희 언덕들아, 왜 어린 양처럼 뛰었느냐?
7 땅이여, 주 앞에서 떨지어다.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8 그분은 바위를 연못이 되게 하신 분이요, 단단한 바위를 샘이 되게 하신 분이시다.

과거 현재 미래

우리는 주로 현재의 불안함 속에서 미래를 두려워 합니다.
지금 상황이 너무 불안하니 앞으로 일어날 일이 두려울 수 밖에요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면 실패했던 기억들만 떠오릅니다.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움은 늘 이런 모습입니다.

학교를 적응 못하는 자녀를 보며 그의 장래가 두렵습니다.
되돌아 보면 아이를 제대로 양육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재정적 불안정함을 보며 앞으로의 경제적 문제가 두렵습니다
되돌아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모습들만 생각납니다.

지금 건강의 어려움을 보며 앞으로의 미래가 어둡기만 합니다
되돌아보면 몸이 아팠던 기억들만 납니다.

지금의 코로나 상황을 보며 앞으로 이 상황이 끝나긴 할까라는 절망이 듭니다
되돌아보면 이런 생각은 늘 들어 맞았던 것 같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맞닥드리고 있는 건 나
미래를 이겨내야 할 사람도 나
과거의 실패를 했던 것도 모두 나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란 존재는 늘 불안하거든요.

시편 114편의 저자는 과거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나’를 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봅니다.
나는 두렵고 떨리고 불안했지만 하나님이 일하셨던 기억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 때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몰랐을 때

나 자신을 바라볼 때는 불안과 두려움만 가득한 그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억합니다.

아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었지
아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지

이 과거의 은혜는
현재의 믿음이 되고
미래의 소망이 됩니다

두렵고 떨리시나요?
지난 삶의 과정 중에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세요
오늘 그 분을 신뢰하세요
앞으로 일할 하나님에게 소망을 가지세요

그렇게 오늘 하루를 또 견뎌내 보자구요.

(김선의)

[함께 나누는 편지 0922]

“너도 쉬어야지”

아버지의 음성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고3이던 1988년의 어느 가을밤,
다들 ‘4당 5락’이 어쩌구 하던 시절,
모두 긴장감에 충혈되어 있던 날들,
피곤해도 불을 끌 수 없던 그 밤에,
말 수 없으신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

“늦게까지 불 켜고 있지 말고 얼른 자라”

아버지의 음성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 쳤던 어느 날,
(사실 야간타율학습이 아니었던가...)
‘어찌 이리 일찍 왔나’ 물으시기에,
‘교실에서 도망쳤다’ 말씀 드렸을 때,
환히 웃으시며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

“매일 그리 할 수 있으면, 일찍 집에 와라”

‘다들 그리 사니까’, 그런 통념을 가로막고
아들에게 ‘숨’을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욕심껏 살아가는 치열한 세상 속에서,
아들에게 ‘쉼’을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안식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내가 쉬듯, 너도 쉬어야지”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생명과 안식의 주인, 그분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그 날에는 너희나, 너희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 남종이나 여종이나, 너희 짐승이나
너희 집 문 안에 머무르는 나그네도
일을 하지 마라(출애굽기 20:10)”

나도 쉴 수 없고, 너도 쉬면 안 되는,
생산성 최우선의 피로사회 속에서는,
누군가의 말처럼, 안식은 저항입니다.
‘생명과 안식’, 누리고 나눠야 할 오늘입니다.

(이길승)

[함께 나누는 편지 0921]

“헌금에 담긴 마음”

요즘 저는 화상회의 어플을 이용해서 성도님 몇 분과 와플큐티나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직접 만나지 못해도 꽤나 안정적으로 서로 대화하고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은 시간입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고린도후서 9장이 본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하는 헌금에 대해 고린도교회에게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헌금이라는 주제 자체가 워낙 우리와 밀접하고 현실적이어서 그랬는지 그날따라 나눔의 분위기가 더 좋았습니다.
큐티 나눔 모임에 참여하신 분들 대부분이 헌금이 어떤 것인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헌금은 금액을 얼마나 하는지, 어디에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웃을 돕는 마음이며, 둘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입니다.

1. 헌금은 이웃을 돕기 위해 내 것을 내어놓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믿는 자들이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은 재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도왔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바울은 헌금에 대해 하나님께 바치는 돈이라는 개념보다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돈이라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 지금 넉넉하게 사는 여러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다면 그들도 넉넉할 때에 여러분을 도와 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서로 도움을 받게 됩니다. “ (고린도후서 8:14)

2. 헌금의 첫 번째 의미가 ‘이웃 사랑’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 돈을 받는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에게 바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진 대로 받을 것이며 없는 것을 받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 (고린도후서 8:12)

큐티 모임 중에 한 분이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자동이체로 헌금을 하고 있는데,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따로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알아서 돈이 빠져나가더라는 것입니다. 헌금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나 부담도 없지만, 그렇다고 헌금에 대해 기쁨이나 감사한 마음도 없는 것이죠. 이웃을 돕는 마음도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교회에 돈을 보낸다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헌금이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한 나눔에 저를 비롯해 다른 참여자들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오후에 교회 카페로 어느 집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랜만에 뵈어서 반갑기도 했지만, 무슨 일로 따로 보자고 하셨을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집사님께서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셨습니다. 지난 2월부터 교회에 못 나오는 동안 집에서 예배하시면서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차곡차곡 봉투에 담아 모아오셨습니다. 집에 있던 헌금 봉투를 다 쓰셔서, 교회에서 봉투를 더 가지고 가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계좌이체로 해도 되고, 봉투 하나에 모아도 괜찮겠지만, 매 달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봉투에 담으셨을 것을 생각하니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헌금을 준비할 때, 꼭 깨끗한 신권을 준비하시는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를 다리미로 다려서 봉투에 넣는 분들도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고리타분하고 율법적인 모습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아닐까요? 봉투를 쓰든, 계좌로 이체하든, 교회에 하든, 어느 기관에 후원하든… 우리 마음이 이웃들을 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으로 가득하면 100원을 드려도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 (고린도후서 9:7)

- 이정도

[함께 나누는 편지 0918]

"생명의 탄생"

한국전쟁(6.25 전쟁) 시절에 겪은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보면 '조그만 목숨 하나가 집안에 드리운 죽음과 우환의 어둑신한 그림자를 몰아내고 밝은 웃음을 가져왔다'는 대목이 나온다. 전쟁의 혹독하고 미래에의 기약이 없는 삶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의 태어남은 전쟁 중에 지친 가족들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주변에서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의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렇지만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어르신들의 어둡고 그늘진 삶에서나, 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힘들어하며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지내는 노인들의 삶에도, 새로운 생명과의 만남은 눈녹은 봄날의 뜰 한켠에서 수줍게 움트는 새싹을 볼 때같이,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숨막히고 헐떡이는 한여름에 마시는 한모금의 찬물과 같이 우리에게 소생하는 기쁨과 감동을 준다. 죽음에 대해 여러 해석들이 이루어져 욌고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은 반갑지 않은 주제이며 경험이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족들의 죽음을 비롯하여 교회 식구들, 이웃들, 인재로 인한 사고든 천재로 인한 사고든 대형사고로 인한 죽음 등, 이런 소식을 지속적으로 듣고 보며 사는 우리들은 어느새 죽음에 대해 다소 무감각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한 희생자들의 통계가 연일 소개되지만, 무뎌진 감각으로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을 방문하시며 한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 행렬을 마주치신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관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심으로 그 청년을 살리셨다. 주검을 마주하신 예수님은 과부와 사람들에게 자신이 생명의 주되심을 보여주셨다.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실 부활의 주님을 예측케 하신다. 죽음과 생명이 만나는 현장이 된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오늘도 돌아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신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오늘도 삶의 거친 현장에서도 만나고 누린다면, 순간순간 죽을 것 같은 오늘의 삶이라해도 고통과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삶을 경험하게 하시리라고 믿는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누가복음 7:11~16)

(황태연)

[함께 나누는 편지 0917]

“반딧불이와의 사랑”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쪼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쪼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쪼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윤동주 시인의 <반딧불>입니다.
여러분은 반딧불을 마지막으로 본지 얼마나 되셨나요? 어렸을 때는 그렇게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반딧불이 지금은 축제를 하는 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귀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귀한 반딧불을 직접 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녁이면 매일 산을 걸었는데 해가 짧아지다 보니 어두워 산을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산이 아닌 천을 따라 걷게 되었는데 천을 걷다 그 반가운 반딧불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십수년만에 본 반딧불이 너무나 반가워 한동안 그곳에 얼음처럼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매일 매일 그 반딧불을 보고자 깜깜한 밤에 그곳을 찾았습니다. 문제는 반딧불이 많지 않아 한 참을 찾아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운좋게 매일 매일 그곳에서 반딧불을 볼 수 있었고 어느덧 반딧불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랑에 빠지다 보니 사진에 담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찾기도 어려운데 사진찍는 것은 훨씬 더 어렵더라구요. 그렇게 계속해서 사진찍기를 시도하다 어제 내 사랑 반딧불을 폰에 담게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이 점이 반딧불입니다.^^)

너무나 반갑고 좋아서 태어나서 반딧불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두 딸에게 아빠가 사랑에 빠진 반딧불을 보여주려고 같이 가자고 했더니 단칼에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설득을 해도 두 딸은 꿈쩍도 안 했고 안타깝지만 결국은 내사랑 반딧불을 두 딸에게 보여주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두 딸에게 반딧불을 보여주고 싶은 그 애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보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떠 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하나님 나라,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 하나님은 애타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데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핑계로, 화려하지 않다는 핑계로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깜깜한 어둠속에서 반딧불 한 마리의 빛은 너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주변이 깜깜하면 깜깜할수록 반딧불이 내는 빛은 더 밝아 보였구요. 지금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깜깜해서 한치 앞도 안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런때 한 마리의 반딧불과 같이 작지만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빛을 내고 있다면 깜깜한 세상 속에서 그 빛은 결코 작은 빛이 아닐 것입니다.

(천재성)

[함께 나누는 편지0916]

"시편 93편"

1 여호와께서 위엄으로 옷 입으시고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위엄으로 옷 입으시고 능력의 띠를 두르셨습니다. 세상이 굳게 서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2 주의 보좌가 옛적부터 굳게 서 있습니다. 주는 영원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3 여호와여, 바다가 뛰놉니다. 바다가 출렁이며 소리를 높이고 철썩거리며 큰 물결을 일으킵니다.
4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더욱 강하십니다. 큰 물결이 치는 소리보다 세시고 파도가 깨어지는 소리보다 더 강하십니다.
5 여호와여, 주의 법도는 굳게 서 있습니다. 주의 집은 영원히 거룩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패션에 관심 있는 분들 많으십니다. 전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긴 하지만 패션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두가지 정도 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모습이니까 중요하고
자아성취의 느낌도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시편 93편은 하나님의 패션센스에 대한 시입니다.
패션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궁금해 하실거 같아요. 하나님의 패션 느낌이 뭘지

1 여호와께서 위엄으로 옷 입으시고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위엄으로 옷 입으시고 능력의 띠를 두르셨습니다. 세상이 굳게 서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패션코드는 위엄입니다. 그런데 그 위엄이 엄근진 느낌의 위엄이 아니라 굳게 서고 흔들림이 없다는 거죠. 흔들리지 않는 성품과 본질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이라는 것이죠.

변하지 않는 존재는 기댈 수 있습니다.
순간의 존재가 아니기에 신뢰할 수 있습니다.
순간의 존재는 변할 것이니까요.

2 주의 보좌가 옛적부터 굳게 서 있습니다. 주는 영원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섭니다. 그것도 훠월씬 넘어서죠.

3 여호와여, 바다가 뛰놉니다. 바다가 출렁이며 소리를 높이고 철썩거리며 큰 물결을 일으킵니다.
4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더욱 강하십니다. 큰 물결이 치는 소리보다 세시고 파도가 깨어지는 소리보다 더 강하십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모든 것이 변해버린 이 시점에
어쩌면 하나님을 찾을 이유마저 사라진 듯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하고 내가 무력해져 버렸을 때
변하지 않고 능력의 존재가 되시는 하나님을 가장 찾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5 여호와여, 주의 법도는 굳게 서 있습니다. 주의 집은 영원히 거룩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장 내일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시대를 사는 요즘
저는 오늘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합니다.

직업이 목사라서 그런거 아니구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제게는 오늘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김선의)

[함께 나누는 편지 0915]

“햇볕 냄새”

온 세상이 바이러스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와중에도 계절은 때를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어느 사이에 바람도 많이 차가워졌고, 햇볕은 말할 수 없이 좋아졌습니다. 페이스북 친구들은 요즘 ‘여기가 우리 동네가 맞나..’ 하며 평소에 보기 어려웠던 하늘과 구름과 불타는 노을이 담긴 사진을 경연이라도 하듯 올려대고 있습니다.

미세먼지를 알리는 제 휴대폰앱에서는 아침마다 “공기상태 최고좋음” 알림을 보내옵니다. TV를 켜면 전어 잡이 소식을 알리며, 후렴구 같은 ‘집나간 며느리’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구요. 아.. 공기도 좋고, 바람도 좋고, 날씨도 좋은데 말입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이거 집에 있을 날씨가 아닌데...’ 몸이 근질근질해 졌지만, 우리는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스크를 잘 착용하고, 동네산책을 나가는 정도였어요. 대부분 그러셨을 겁니다. 그래도, 그 짧은 틈에도 가을하늘, 바람, 햇볕은 여느 해와 다른 감동을 주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이렇게 귀한 게 되어버린 탓이겠지요. 코로나가 일상을 다 빼앗아 갔지만, 되레 코로나가 선물해준 것이 ‘일상’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산책길에, 어릴 적 우리 할머니가 햇볕에 널어놓은 나물을 코에 갖다 대시며, ‘햇볕냄새’가 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표현이 그렇게 예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거든요. 시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손주랑 일상을 나누던 우리 할머니 입을 통해 들어서 더 아름다웠을 겁니다.

할머니는 그저 햇볕냄새가 나기에 햇볕냄새가 났다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은유법을 따로 공부해서가 아니라, 그저 일상 속에서, 온 감각을 바람처럼, 햇볕처럼 열어두고 사셨기 때문일 겁니다. 정작 시인은 말의 기술자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모든 감각을 열어둔 평범한 생활인이지 않을까요?

가을입니다. 대자연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 황홀한 계절입니다. 계획적인 삶, 성실한 삶, 효율적인 삶 등등, 그럴듯한 핑계로 소중함을 잊고 지냈던 일상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온갖 이유로 닫아두었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모두 열고, 너도 나도 시인이 되어야 할 계절입니다. 오늘도 햇볕냄새가 참 좋습니다.

(이길승)

[함께 나누는 편지 0914]

"K-좀비 전성시대"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가 우리나라 작품이라는 반가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유아인이 주연한 좀비 영화 ‘#살아있다’가 무려 35개국에서 무비 차트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강동원 주연의 좀비 영화 ‘반도’가 극장에서 인기를 끌었고, 그 전에는 넷플릭스에서 야심차게 제작한 ‘킹덤’ 시즌2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금 과장을 덧붙인다면 2020년은 K-좀비물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좀비물이 계속 제작되고,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서 궁금해졌습니다. 좀비영화의 인기 요인은 뭘까요? 좀비영화의 어떤 점이 다른 공포물들보다 좀비영화를 더 대중적으로 성공하게 만드는 걸까요?

좀비 영화의 매력
1. 좀비라는 소재는 현대인들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담기에 좋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이 마비되고, 오직 욕망(주로 식욕)으로 움직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있기에 혼자 있을 때는 그다지 무서운 존재가 아니지만, 좀비들은 주로 몰려다니면서 숫자로 힘을 과시합니다. 좀비 장르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를 미국 사회와 대중들에 대한 풍자적인 시선으로 활용한 이래로 좀비 영화는 대부분 어느 정도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2. 대부분의 경우에 좀비들에게는 인해전술이 가장 큰 무기입니다. 이 부분은 좀비 영화에 스팩타클한 볼거리를 더해줍니다. ‘월드워Z’에서 예루살렘 성벽을 넘어가는 수많은 좀비들의 모습은 사실 공포스럽기 보다는 멋진 액션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레지던트 이블’시리즈나 ‘나는 전설이다’같은 영화들은 공포영화라는 장르보다는 할라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적당한 긴장감이 있지만 너무 무섭지는 않고,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공포물이라는 점이 좀비 영화가 가진 독특한 매력인 것 같습니다.

3. 마지막으로 좀비영화의 매력은 ‘유물론적 설득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게 된 현대인들에게 좀비는 나름대로 ‘있을 법한’ 소재라는 거죠. 처음에는 좀비도 다른 공포영화의 소재들처럼 신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두교’의 주술을 이용해서 시체를 움직인다는 설정이죠. 그런데 조지 로메로 이후 그런 설정은 그다지 사용되지 않기 시작했고, 데니보일 감독의 ‘28일 후’에서는 본격적으로 바이러스가 좀비화의 원인으로 등장합니다.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바이러스가 어찌 어찌해서 뇌를 움직일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좀비가 된다는 겁니다. 영혼만 남아 둥둥 떠다니는 귀신들이나, 보름달을 보면 변하는 늑대인간, 이유 없이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드라큘라에 비한다면,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28일 후’의 분노 바이러스나 ‘킹덤’의 생사초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 버렸는데, 사실 하고 싶은 말은 3번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공포영화마저도 영적인 세계의 신비를 인정하지 않고, 실험실의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괴물이 더 설득력 있게 와 닿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이 본인의 종교와 무관하게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와 영적 세계의 존재를 긍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면, 이제는 무신론과 유물론이 세상의 기본값이 되었습니다. 21세기의 좀비영화들은 이제 그 사실이 대중문화에까지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런 대중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의 신비와 영적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믿지 않는 세대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람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필요한 것처럼,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삶이 영적 세계의 존재를 보여주는 나뭇가지이면 좋겠습니다.


- 이정도

[함께 나누는 편지 0911]

"시작은 반?"

어느 분이 그러더라구요.
시작은 반이 아니라, 99% 라구요. 무엇이든 일단 시작을 해봐야 된다는 말이겠죠?

시작이란게 그렇게 힘든건가 봅니다.
두려움이 앞설 때도 많구요. 특히나 돈도 없고 힘도 없고 빽도 없어,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질 째 망설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새로운 도전이나 시작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최근에 만난 책 중에 <낮 12시, 책방 문을 엽니다>라는 책이 있는데
책의 저자는 평소에 사람과 책에 관심이 많았는데 오랜 고민 끝에 동네 책방을 오픈 하기로 마음을 먹고 운영하게 되는 이야기 입니다.
헌책도 판매하고 새책도 판매하는 그런 책방 컨셉에 몸을 던져 시작한 셈이죠.
그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40평 빈 공간을 보증금도 없이 최소한의 세만 내는 조건으로 활용해보지 않겠냐는 지인의 제안을 받고 무조건 시작하기로 함.

집에서 사용하던 책장과 더불어 이케아 (IKEA) 책장을 저렴하게 구입해서 지인과 둘이서 며칠에 걸쳐서 조립을 완성함.

책장의 빈 공간을 채워야 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지인에게 갑자기 연락
이 왔고 그 전화의 내용은 2만 권의 책을 기증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음.
결국 그 집에 찾아가서 친구 두 명과 같이 하나 하나 검수한 끝에 2만권 중에서 2천권을 골라서 가져옴.

여전히 40평 빈 공간을 채우기엔 터무니 없이 모자랐을 때 또 한 통의 연락을
받게되는데 많은 책이 부부 사이를 방해하고 있다며 좋은 일에 써 달라고
책 3천 권을 기부하고 싶다 함.

그 이후에도 책이 조금씩 모아지고 쌓여지면서 원래 계획했던 목표인 만권의
책이 모두 채워졌고 서점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그 과정을 설명한 저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제 파는 일만 남았다.”

저자는 현장에서 책을 판매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온라인’ 판매로 사업을 확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나 코로나 시대인만큼 사람들이 서점을 편하게
다닐 수 없으니 말이다. 저자에게는 이것 역시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이제 파는 일만 남았다”는 말이 참 짠하게 들렸습니다. 책을 파는 일이 어디 만만한 일일까요?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시작은 반이라기 보다 오히려 99% 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김요한)

[함께 나누는 편지 0910]

"네 마음을 지켜라"

매주 목요일 오전은 회의를 하는 날입니다. 치열?하게 회의를 하고 끝날 때 쯤이면 더욱 치열?한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입니다. 뭘 먹을지 메뉴를 선택하는데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지는데
첫째는 메뉴 선택에 적극적인 형 입니다. 먹고 싶은 게 아주 뚜렷하고 자기 어필을 적극적으로 합니다. 두 번째 일단 거절하고 보는 유형입니다. 난 그거 별론 데.. 세 번째 싫지만 억지로 따라가는 유형입니다. 네 번째 뭘 먹든 아무래도 좋은 유형입니다. 난 아무거나 좋음. 다섯 번째 먹고 싶은 거 어필을 안 하면서 계속 투덜대는 유형입니다. 여섯 번째 갈대와 같이 계속 바뀌는 유형입니다. 부대찌개도 먹고 싶고, 스파게티도 먹고 싶고…. 일곱 번째 별 생각 없이 따라가는 유형입니다. 여덟 번째 추천도 안 하면서 빨리 결정 못한다고 답답해 하는 유형입니다. 아홉 번째 한 메뉴로 만족 못하는 유형입니다. 우리 부대찌개와 스파게티 다 하는 곳으로 가자.. 난 부대찌개 시킬게 넌 스파게티 시켜서 나누어 먹자~~

여러분은 어떤 유형입니까? 저는 별 생각 없이 따라가는 유형인 것 같습니다. 메뉴 결정을 하며 제 주장을 많이 하지는 않는 편 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대부분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 이유, 메뉴를 결정하며 이것저것 논쟁하는 게 싫기도 하고 추천했다 괜히 좋은 소리 듣지 않으면 어떠나 하는 것도 있구요.

문제는 이런 성향이 메뉴 고르는 일에만 적용이 되면 좋으련만 제 삶의 많은 부분에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기 보다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나 눈치를 보다가 거기에 맞춰서 이야기를 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 보다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해 버린 거죠.

요즘처럼 주변에서 많은 소리들이 들려오는 이때에 여전이 눈치만 보고 있는 저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잠언 4:20-23
20내 아들아,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 말들을 귀담아 들어라.
21내 말을 잊지 말고 네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라.
22내 말은 깨닫는 자에게 생명이 되고 온몸을 건강하게 해 준다.
23무엇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부터 흘러 나오기 때문이다.

(천재성)

[함께 나누는 편지 0909]

시편 54편

1 오 하나님,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해 주소서.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해 주소서.
2 오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소서.
3 낯선 사람들이 나를 공격합니다. 무자비한 사람들이 내 생명을 찾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셀라)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며,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5 나를 중상모략하는 자들에게 불행이 닥치게 해 주소서. 주는 성실한 분이시니 그들을 망하게 해 주소서.
6 내가 주께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예물을 바치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는 좋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7 주께서 나를 모든 어려움에서 건지셨고, 내가 내 원수들이 넘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왕의 자리를 넘본다고 생각하는 사울은 어떻게든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도망다니고 있구요.

이 시가 쓰여진 배경은 사무엘상 23장 중반입니다

사울에게 거의 잡혔을 때, 완전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때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 소식을 들은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는 발길을 돌립니다.

요 때 이 절박한 상황에 다윗은 숨어서 이렇게 고백하는 거죠.

어때요? 완전 느낌이 다르지 않나요?
그러니까요. 이게 그냥 성경 구절들이 아니라니까요
구구절절 다윗의 긴박한 위기 속에서 나오는 탄식이라니까요.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다윗의 메달림이죠.

그리스도인이 가장 잘 해야 할 것은 메달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멋지고 모범적이고 근사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메달림이죠.

자주 교회 가족분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잘 얘기 안하시려 할 때가 있어요
물론 사생활을 존중하고 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결정하는 자유도 존중합니다만
다른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경우도 많거든요.
근데 뭐 가십거리 좀 되면 어때요.
수퍼스타 정도 되야 가십거리 나오는 거거든요.
가십거리가 된다면 본인이 수퍼스타이신거지요.

여튼 솔직히 막 메달리는 거 완전 중요해요. 정말루요.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메달릴 수 있을까요?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며,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놓지 못하는 분이시거든요.
이 분은 우리가 가장 솔직하고 정직하게 메달릴 때 가장 기뻐하시거든요.
“글치 글치 내 새뀌 마뉘 힘드뤘찌? ”

약간 이런 느낌?

그니까 그냥 메달리는 거에요.

5 나를 중상모략하는 자들에게 불행이 닥치게 해 주소서. 주는 성실한 분이시니 그들을 망하게 해 주소서.

전 이런거 완전 좋아요. 솔직한 거
저 인간들 확 망하게 해주세요.
정말 망하게 될까봐 부담되신다구요? 그건 하나님한테 맡기고
우선 내 마음의 가장 밑바닥까지 있는 감정의 부스러기까지 하나님한테 쏟아내자구요

6 내가 주께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예물을 바치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는 좋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7 주께서 나를 모든 어려움에서 건지셨고, 내가 내 원수들이 넘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한테 수고비 내자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을 기뻐하자는 거죠. 다윗한테는 이제 남은 건 하나님 뿐이거든요.
그에게 삶의 기쁨을 그나마 발견할 수 있는 근원은 하나님밖에 안남았거든요.

죽도록 고생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어요
엄청 잘나갈 때도 잠시 멈춰서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어요
예배, 기도, 찬양, 헌금, 전도, 등등
우리 업계에서 권하는 사항들은 모두 같은 목적이에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어떻게 이거 가능하냐구요?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즐거워하시거든요.

다른 거 다가져도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글쎄요. 정말 행복한걸까요?

(김선의)

[함께 나누는 편지 0908]
“새로운 대화”

어느 가을날,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고 싶어 산책을 나갔습니다. 한참동안 가을 숲길을 걸었어요. 그런데 기대와는 다르게 으슬으슬 추워지는 겁니다. ‘아니 이 가을바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너무 시원했는데.. 가을바람 안에 겨울이 숨어 있나봐..’, 더운 여름 식혀주며 친절히 불어와 추운 겨울 준비하게 해주는 멋진 바람이라는 생각, 그 바람을 닮은 여러 사람들 생각에 이르도록, 그렇게 가을바람이 제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소리는 없지만, 분명 말을 걸어온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있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소리’라는 익숙한 소통방식의 한계 너머로, 너무나 자연스럽고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는 거대한 대자연의 언어, 놀라운 진리와 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그렇게 열심히 서로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습니다.

(시 19: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시 19:4a)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익숙한 우리의 경험과 방식을 뚫고, 전혀 다른 방식의 언어로 누군가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 그걸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능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을 걸어온 대상을 향해 대답할 수 있는 창조적인 언어의 능력도 함께 주셨지요. 그래서 우리도 그 신선한 대화에 언제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무언가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건네올 때, 사람들 역시 새로운 언어로 대답을 건네 왔습니다. 그것이 시가 되었고, 노래가 되었고, 그림이 되었고, 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언어, 새로운 방식의 대답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누군가 무언가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어느 가을날이 말을 걸어오기에, 저도 이렇게 노래로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가을바람 같은 노랠 언제나 부를 수 있을까
내 노랠 들을 때마다 다시 시작해야지 설레는 마음 생겨나는
그대 눈 길 같은 노래를

가을바람 같은 노랠 언제나 부를 수 있을까
내 노랠 들을 때마다 추운계절 생각나 따뜻한 마음 준비하는
그대 숨결 같은 노래를”

지금도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 무언가에게, 익숙한 말과 소리의 세계를 잠시 떠나, 각자의 모양대로 새롭게 대답하며 소통해보는, 새로운 계절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길승)

[함께 나누는 편지 0907]

"뻔한 드라마"

서로 너무나 사랑하지만 가난하게 생활하는 주인공 커플이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로 사랑하며 살던 중에, 여차저차 해서 남자는 좋은 회사에 들어갈 기회를 얻습니다. 여주인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남자는 곧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승진합니다. 좋은 집으로 이사가고, 좋은 차를 탑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주인공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듭니다. 여주인공이 외로워할 때마다 남자는 “널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새 남자의 마음에는 여주인공보다 성공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겠죠. 뻔한 드라마의 뻔한 결말입니다.

여주인공을 위해서 돈을 벌겠다고 시작했는데, 결국 여주인공을 버리고 돈을 택하는 남자의 이야기. 이런 상황을 ‘주객전도’라고 합니다. 요즘 우리 모습을 보면 이런 뻔한 드라마가 떠오릅니다.

우리가 모이는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결국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한 것이죠. 그리고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예배’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모여서 말씀을 듣고 배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이는 것 자체가 너무 강조되다보니, 우리의 모임을 통해 이웃이 어려움을 겪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마치 여주인공을 위해 성공하려던 남자가, 성공 때문에 여주인공을 버리는 것 처럼요. 우리가 그렇단 말이죠.

여기까지 읽으신 당신은 지금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최근의 현장예배와 코로나19 방역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 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제가 계속 ‘우리’라고 표현한 것이 조금 거슬리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그런 겁니다.

사실 코로나19 방역과 현장예배의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안에 잠재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예배에서 조금이라도 더 은혜받기 위해 사용한 큰 사운드가 이웃에게 소음의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을 무시했을 때부터, 또는 우리가 모이는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이웃들이 사용하는 골목에 불법 주차를 했을 때부터 말입니다.

뻔한 드라마에서 남자는 한 번에 악역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거죠. 하지만 사실 드라마 1화를 볼 때부터 시청자들은 남자가 결국 주인공이 아니고, 악역으로 변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뻔한 드라마의 뻔한 설정과 뻔한 연출은 남자의 ‘눈빛’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주인공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성공과 돈을 향한 욕망을 드러내는 숨겨진 ‘눈빛’ 말이죠. 상황은 천천히 변해가지만 사실 사람은 이미 그렇게 될 만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우리 이야기를 해보죠. 우리에게 일어난 이 ‘주객전도’는 천천히 일어난 일일까요? 원래는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기 위해 모였던 것인데, 모이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다보니 조금씩 우리 마음이 변해서 지금의 상황까지 온 걸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우리가 모인 이유가 내가 잘되고, 내가 성공하기 위한 것이었던 걸까요?

현실은 뻔한 드라마의 연출처럼 우리 속마음을 드러내주지 않아 어쩌면 우리 스스로도 답을 못 찾을지 모르겠습니다.


- 이정도

[함께 나누는 편지 0904 ]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한 사람은 군인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어느날 군인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 한명을 겨울철 벌판 위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전쟁으로 학교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 아파합니다.
한참 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에 공부할 기회를 빼앗긴 셈이니까요.
그 군인은 학생에게 제안을 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군인은 21세의 카얼 파워스 상사였습니다.
15세 소년의 이름은 김장환 이었습니다.
“너 미국 가서 공부하지 않을래? 내가 도와줄게.”

사실, 그에게는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빽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명의 학생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 그것 하나였습니다.
왜냐면 한꺼번에 자신이 그 주변의 모든 학생들이나 전쟁 고아들을 도울 수
없었지만 한명은 잘하면 도울 수 있겠다는 작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이 인연이 되어 ‘빌리’ (소년 김장환)는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파워스 상사는 그의 약속을 지켜 무려 8년동안 빌리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학업을 마친 뒤에는 다시 고향인 한국 땅으로
그를 돌려보냅니다.

누군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냐구요.” 그때 수녀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한번에 한 사람씩 도울 뿐입니다.”

한번에 한 사람이면 됩니다.
한번에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셨나요?
한번에 한 사람씩.

모두 어려운 때 입니다. 하지만 한번에 한 사람에게 다가가면 됩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한 사람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고,
한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한 사람 옆에 가만히 있어주고,
한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한번에 한 사람씩.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 김요한 -

[함께 나누는 편지 0903]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요즘은 이런 인사를 주고받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먹을 게 없던 시절에는 흔한 인사였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먹을것이 없어 자다가 굶어 죽고,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을 곳이 없어 밤사이 유명을 달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오늘은 옆집 누구네에 누구 굶어 죽었다느니, 병이 났다느니 하는 소식을 자주 들었고 밤새 죽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이 반가워 나눈 인사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인사였다고 합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인사가 다시 필요한 요즘 인 것 같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코로나 19확진자가 몇 명이네 어느 동네에서 나왔네, 우리 지역도 확진자가 나왔네…. 누가 열이 38도를 넘었네… 거기사는 누구누구는 괜찮나? 이렇게 말이죠.

또 요즘 매일 매일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안부를 물어보고 싶은 곳이 있죠. 바로 교회입니다.
세상의 비난의 손가락이 온통 교회를 향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슴 아프게도 교회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알면서도 모른척 하는 것인지, 진짜 모르고 있는 것인 지, 알고 싶지 않은 것인지….
빛과 소금이 아닌 세상의 걱정거리가 된 교회에게..
“밤새 교회는 안녕하셨습니까?”
“교회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교회는 잘하고 있습니까?”

- 천재성 -

[함께 나누는 편지 0902]

시편 85편
고라 자손의 시.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1 여호와여, 주께서 이 땅에 은혜를 베푸시고, 야곱의 자손들을 다시 번영케 하셨습니다.
2 주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잘못을 다 덮어 주셨습니다. (셀라)
3 주께서 분노를 거두시고, 노여움을 푸셨습니다.
4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 우리를 향한 주의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5 언제까지 우리에게 화를 내시렵니까? 언제까지 우리 자손에게 노여움을 거두지 않으시렵니까?
6 다시 한 번 우리를 살려 주소서. 그러면 우리가 주께 감사하며 주를 기뻐할 것입니다.
7 여호와여, 우리를 극진히 사랑해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8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주는 주의 백성, 거룩한 무리들에게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어리석게 살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9 하나님을 높이고 존경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할 것입니다.
10 사랑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로움과 평화가 포옹할 것입니다.
11 신실함이 땅에 가득하고, 의로움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12 여호와께서 참 좋은 것을 주시니 이 땅에서 풍성한 곡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13 주의 의로움이 앞서 행하며 주께서 가시는 길을 준비합니다.

전 목사의 아들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습니다.
평생 작은 교회 목사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가정사항에 대해 기록하는 종이에
아버지 직업을 ‘목사’라고 넣는게 너무 챙피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왜인지 모르지만… 종교인이라는 게 그냥 챙피했던 거 같았습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저도 이 업계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 기억을 더듬어 결심했습니다.
종교인스러운 목사가 되지 말자.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목사가 되면 그래도 내 아이들은 아빠가 목사인 것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부끄럽지 않겠지.
나름 열심히 했던 거 같습니다.
권위적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고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초등학교 6학년 둘째 제나가 얼마전에 말합니다.
아빠가 목사님이라고 말하기 요즘 창피하다고.
아이들이 이상하게 볼 거 같다고
저도 참 요즘 창피합니다. 원망스럽기도 하구요.
이 분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지금 우리가 목사든 아니든
신앙을 가진 이라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옳다고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이웃을 위해 이 땅을 위해 기도해야겠죠
당당하게 말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손가락질 하기보다 나 자신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은 그저 시편 85편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 읽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같이 기도하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 김선의

[함께 나누는 편지 0901]
“언어 감수성”

감염 원인이나 경로를 확인하기 어려운 감염을 쉽게 '깜깜이 감염'이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그런데 방역본부가 앞으로는 '깜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8월 마지막 날 오후 브리핑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의 개선 요청을 받아서 '깜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깜깜이 투자’, ‘깜깜이 청약’, ‘깜깜이 분양’등의 용례를 통해 알 수 있듯, ‘깜깜이’는 어떤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하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돼 왔습니다. 그러나 시각장애를 비하하는 차별적 표현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국민들 의견을 받아서 그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자 한다고 밝히고 앞으로는 깜깜이 대신 ‘감염경로 불명’이나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확진 환자‘라고 사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내용을 실은 기사의 댓글 창을 살펴보았습니다.

“조심해서 쓰겠습니다”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섬세하기도 하여라..”
“덕분에 알고 갑니다~”
“딸에게도 알려 줬어요”
“질본분들 참 세심한 듯”
“자기반성 훌륭합니다”

“언어감수성”은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서 시작됩니다.
겸손한 반성과 돌이킴은 무심했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생명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감수성은 여러 모양으로 확산되어야 하겠지요.

한편 통상적으로, 편의상 ‘깜깜이’라고 쓰는 게 무엇이 그리 문제인가?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무슨 말을 하고 살 수 있겠는가? 나름의 이유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명료한 논리나 법적인 정당성 너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원초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선생님의 가르침을 떠올려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전서 10:23-24)”

- 이길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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