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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교회 목양칼럼친구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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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한반도는 세습 천국입니다.

지구촌 대부분의 국가들이 선거를 통해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뽑는 마당에 이 무슨 왕조사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짓인지 북한은 벌써 세습 3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 우리의 사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과연 북한의 3대 세습을 욕할 자격이나 있나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한 해 매출이 우리나라 국가 예산을 가볍게 넘어서는 이 땅의 재벌 기업들은 하나 같이 세습으로 그 총수직을 대물림했습니다. 벌써 북한 같은 3대 세습 총수도 나왔지만 회사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고 세습했다고 누가 그 재벌사를 욕하는 경우도 보지 못했습니다. 기업과 국가가 같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재벌 기업들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국민 경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재벌 기업쯤 되면 준국가라고 봐도 가히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굴지의 언론사들도 마찬가집니다. 북한의 세습에 대해 <북한 주민은 주권자가 아니라 김씨 일가를 영원히 모셔야 하는 종복에 지나지 않는다>며 비판했던 우리나라 최대 신문사도 현 사장이 4대째니까 북한의 3대 세습마저도 비웃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재벌과 언론사 외에도 또 하나 막강한 세습 집단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교회입니다. 독재자는 국가권력을 세습하고 재벌과 언론사는 부를 세습한다지만 세속 기관도 아닌 교회는 대체 무엇을 세습할까 싶은데 우리나라의 대형교회들은 1997년 서울 강남의 충현교회를 시작으로 2001년 광림교회, 구로중앙교회, 2008년 금란교회, 2013년 임마누엘교회로 그 세습전통이 이어지면서 현재는 전국에서 364개 교회가 세습으로 담임목사직 승계를 마무리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지난 주중 폐회한 우리 교단(예장 통합) 103회 총회 역시 최대 이슈는 <세습>이었습니다. 2013년 9월에 제정한 우리 교단 헌법 정치 제28조 6항입니다.

<해당 교회에서 사임 또는 은퇴하는 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 비속과 그 직계 비속의 배우자, 해당 교회의 시무장로의 배우자 및 직계 비속과 그 직계 비속의 배우자는 담임목사가 될 수 없다.> 이렇게 교단의 <세습방지법>이 엄연함에도 명성교회는 2017년 3월 19일 김삼환 목사의 아들 김하나 목사의 담임목사 청빙을 절대 다수의 지지로 결의했고, 11월 12일 김하나 목사가 전격 명성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동안 명성교회는 <김삼환 목사는 이미 2년 전인 2015년 은퇴를 했기 때문에 ‘은퇴하는’ 목사가 아니라 ‘은퇴한’ 목사이므로 김하나 목사의 담임목사 청빙은 위법이 아니다>고 주장했고, 이후 노회도, 총회 재판국도, 헌법위원회도 이를 추인하며 명성교회 측의 손은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이번 총회는 달랐습니다. 결국 새로 구성된 15명의 재판국원들로 하여금 명성교회 청빙 무효소송을 재심토록 결의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옛날 선교 초기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를 하다 세상을 떠나면 다시 그 자녀들이 우리나라를 찾아 와 그 선교사업을 세습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걸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보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세습이 문제가 될까요?

지금의 대형교회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고난과 희생이 아니라 다시없는 꿀보직의 승계이자 금수저의 대물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끊임없이 세속의 가치를 본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범은커녕 도리어 세상의 걱정거리, 비웃음거리가 된 것입니다.

모두가 두 눈 부릅뜨고 명성교회 재심결과를 지켜 볼 일입니다.

가을 채비

(119.194.29.232) 조회 수 0

밤새 천둥 번개가 치고 요란스레 비가 퍼부었습니다.
곳곳에서 물난리가 나고 온 세상이 비에 흠뻑 젖었습니다.
빗소리가 끊긴 새벽,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습니다.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음입니다.

몹시 힘들었던 폭염과 열대야 속에서도, 사나운 태풍과 집중호우 속에서도 이렇듯 계절이 다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요. 여름이 제아무리 무자비하다 해도 우주의 괘도를 도는 계절의 순리 앞에서는 결국 그 기세를 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저 시도 때도 없이 날뛰는 건 오직 우리 인간들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 며칠 간은 선풍기를 끄고 잤습니다. 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벌써 홑이불이 너무 얇게 느껴져 좀 포근한 이불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번 휴가는 당초 계획했던 제주도 길이 태풍에 막혀 퍼붓는 비,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뚫고 저 강원도 설악산과 충청도 청풍호를 다녀왔습니다. 설악산 신흥사와 권금성 쪽의 숲에서는 이미 가을 느낌이 묻어 났고, 청풍호 주변의 숲들과 나무들에서도 저만치에서 오고 있는 가을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을 채비는 산의 나무들에게도, 숲속의 풀벌레들에게도, 올 여름 모진 폭염을 견뎌낸 우리 사람들에게도 다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 위를 지나다 문득 동화작가 이수호님의 시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 수몰되어 물속에 갇힌 학교며 동네 위를 유람선을 타고 지나갔다 / 누구도 그 깊은 물속에 그런 마을이 있었다고 기억하지 않았다 / 세월의 흐름에 시대의 변화에 / 깊이 잠겨 있을 뿐이었다 / 두려웠다 / 우리도 그렇게 잠겨가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야말로 지금 현실을 핑계로 본래 품었던 믿음의 생각들이 차츰 둔감해져가고 변질되어 감에도 아무런 감각도 고민도 없이 도리어 편안해하며 추해져가는 자신의 몰골을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요? 요즘은 마음에 깊이 품고 남을 사랑하는 일이 아주 구식이 된 시대입니다. 온통 잠깐의 흥미로운 대상을 고르는 일이 세상을 주도하는 세태가 된 것입니다. 묘하게도 몸을 겹겹이 감싸던 시대는 상대에 대한 마음이 깊었지만 노출이 일상화된 요즘은 드러난 몸이 일차적 목표가 된 문화입니다. 그래서 심지 깊은 사람을 보기 어렵고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또한 만나기가 힘들어 갑니다. 부디 짙게 화장한 이 시대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기를 빕니다. 가을바람처럼 창문 너머 그대의 방을 가득 채우고 비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감사와 감격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그리워지길 기도합니다. 현실이 견고하게 짜놓은 성곽은 안전판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탈출하지 못하게 가두는 영혼의 감옥이 되지만 초월과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우리에게 상상 이상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곤 합니다. 이번 가을에는 비 내린 다음 날 오후처럼, 바람 선선한 깊은 산 맑은 물처럼, 깨끗한 하늘 빛 영성이 성큼 우리 안으로 들어왔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자유로운 영혼

매미 소리가 갈수록 치열합니다.
폭염이 절정으로 치닫는 요즘 마치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밤낮으로 토해내는 뜨거운 자연의 소리에 차라리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최근 시중 유명 서점의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50-60대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소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중장년층들의 자유인에 대한 동경과 아쉬움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더 늦기 전에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물론 배부른 노예와 가난한 자유인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웠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노예가 되어 있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실은 더 심각한 노예가 되어 있다.>
이 도발적인 글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불을 지핀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첫머리입니다. 루소의 이런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상이 대혁명의 불씨가 되어 이름 없는 민초들이 일어나 부패한 권력자를 그 권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 이후 인류는 실로 많은 영역에서 자유를 쟁취했습니다. 신분제와 노예제 폐지는 물론 오늘날 대다수 문명국가 시민들이 누리는 인권, 사유 재산권, 선거권,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과 같은 권리들이 다 불과 수 세기 사이에 주어지고 보장된 자유의 산물들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정말 자유로울까요? 애석하게도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힘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진보를 눈부시게 이룩한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과거에는 주로 군주들의 폭정과 착취, 종교적 도그마, 가부장적 전통과 일방적인 사회 규범 같은 게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제한했다면 지금은 기득권 세력들의 횡포와 사람들의 탐욕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내팽개친 채 오로지 소유에만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당부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지금 자유합니까? 정말 그 어떤 것의 노예도 아닙니까? 놀랍게도 신앙생활 자체가 때로 우리를 비굴하게 하는 현실을 봅니다. 이건 대체 뭡니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렇게 자유를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통쾌한 일침을 가합니다. 소설의 화자가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우연히 조르바를 만나는데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르바의 첫 인상을 묘사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 조르바는 살아 있는 가슴과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모태인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채 끓어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조르바를 정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자유>입니다.
그는 전통과 관념과 사회적 규범을 넘어선 진정한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조르바의 인생관은 <앞뒤 재지 말고 일단 해보자!>입니다. 조르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확대경으로 물속을 들여다보면 균들이 우글거리지요. 그걸 보고는 못 마시지 ... 그러나 안마시면 목이 타고 ... 확대경을 부숴버려요! 그럼 균들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도 번쩍 들 테니까 ...!>

올 여름 휴가 때는 저도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훨훨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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