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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교회 목양칼럼친구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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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

벌써 한 해가 다 갔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무척 빠른데, 또 연초에 있었던 여러 일들을 생각해보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연말입니다.

그게 어떤 것이든 사실 글을 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글쓰기란 여전히 매력적인 일이지만 그게 제게서 빼앗아가는 에너지 또한 해가 갈수록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막상 끝내고 보면 보잘 것 없고 얼마 되지도 않은 분량인데 하루 종일 붙잡고 있을 때도 있고, 단지 손가락과 머리만 좀 썼을 뿐인데 요즘은 끝나고 나면 한두 시간 운동이라도 한 듯 피곤하기까지 합니다. 더욱 맥 빠지는 건 여러 시간 고군분투한 글임에도 조회수가 영 초라할 때 <그래, 사람들이 이런 글에는 별 관심이 없지...>하며 신경을 끊으려 해도 뒷맛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니체는 늘 어렵고, 제가 그닥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러나 늘 꺼내보며, 또 읽을 때마다 다시 한 번 더 삶을 골똘히 생각해 보게 하는 참 묘한 사상가입니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이라는 책 속 <최대의 중량>이라는 제목의 글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어느 날 밤 악령이 당신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들어와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너는 지금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을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 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아픔들만이 네게 다시 찾아 올 것이다” ... 그대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악령에게 이렇게 말하는 엄청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너는 신이로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노라!” 이 문제는 확실히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그대는 이 최종적이고도 영원한 확인과 봉인을 위해 어떻게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가야 하겠는가?>
그렇습니다. 이 주제는 과연 우리 인생의 <최대의 중량>을 가진 문제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니체의 말대로 매년 반복되는 우리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연적인 선택지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 삶의 매순간을 행복한 내용으로 채우거나 아니면 때로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해피엔딩을 약속 받아 두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삶 일체를 긍정해 버리거나... 물론 첫 번째 경우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산다는 건 결코 그렇지만은 않고, 두 번째는 힘들긴 해도 그러나 해피엔딩을 생각하며 참고 견딜만 할 것이고, 세 번째 선택지는 사실 누구나 다 사양하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은 늘 이 세 번째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가 뭐래도 저는 긍정의 힘을 믿고, 주님을 신뢰하기에 당장 눈앞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맨 마지막에는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며 끝날 것임을 확신합니다. 올해만 해도 이런저런 많은 아픔과 무거운 짐이 있었지만 그러나 돌이켜보면 감사한 일이 더 많았고, 어려운 중에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예가 더 많았기에 결국은 <해피엔딩>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오히려 비극적인 결말의 과정에서 공감과 감동을 느끼며 영혼과 감정이 정화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했지만, 성경은 <해피엔딩>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모두에게 올 한 해의 마무리가 해피엔딩이기를, 그리고 또 다른 해피엔딩을 기다리며 자신의 삶을 더욱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날은 저물고 배는 흔들리는데

세밑 풍경이 을씨년스럽습니다.
찬바람 부는 겨울, 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사실 시간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빈틈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김없이 육박해 들어오는 까닭에 우리는 때로 그것을 마치 기습이나 당한 듯 <어느새>라고 표현할 뿐입니다. <어느새>란 우리의 무방비를 폭로하는 말이지 시간의 도발을 이르는 말은 아닙니다. 제게는 요즘 <세월이 쏜 살 같다>는 말이 전혀 과장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세월의 속도가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도 무한 공감입니다.
비록 날이 저물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올 역시 우리는 힘껏 노 저어 저 바다 건너편까지 가야합니다.
주님은 어느 날 늦은 시간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막 4:3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단이 났습니다. 밤바다 한가운데서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를 만난 것입니다. 순식간에 바닷물이 덮쳐 배가 가라앉게 된 경각의 위기, 그 와중에도 주님은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당황한 제자들이 주님께 달려가 힐난하듯 도움을 청합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됐는데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어찌 주무시기만 하십니까?> 그제서야 깨어나신 주님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며 풍랑을 제압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까지도 나무라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언제나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두려움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꺾는 적이요, 소망의 불을 끄는 바람이자 우리의 운명의 배를 침몰시키는 파도며 기도의 능력을 가로막는 칠흑 같은 밤바다입니다. 두렵다는 것은 결국 내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주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불신앙의 소치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이 <어찌 믿음이 없느냐?>며 호되게 책망하신 겁니다. 큰 위기 앞에서도 우왕좌왕하지 않는 담대함, 거친 풍랑에도 노 젓는 힘이 약해지지 않도록 격려하는 리더십, 사람의 힘으로서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할 때 그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결단, 이게 바로 험한 바다를 건너기 위해 뱃길에 나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밤바다 한복판에서 거친 풍랑을 만난 조각배 형국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날, 아니 당장 코앞에 닥친 새해의 이런저런 불확실성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며 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용기를 가져야 하고 믿음의 담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큰 확신으로 세상을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러면 비록 날이 저물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제자들처럼 무사히 <바다 저편>에 가 닿게 될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다들 마음이 시린데 요 며칠 새 갑작스러운 대설 한파로 사람들이 더욱 어깨를 움츠린 채 종종 걸음을 치고 있습니다. 애써 마음의 여유를 가집시다. 사랑으로 가슴을 훈훈하게 데웁시다. 이제는 거리에서 캐롤도 사라져 세밑이 더 삭막해졌지만 그래도 따뜻한 마음으로 주님의 성탄을 기다립시다.

대강절 촛불

전통적으로 대강절(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성탄절 전 4주) 촛불(Advent Candles)은 푸른 나뭇가지로 둥글게 엮어 만든 화환에 모두 5개의 양초를 꽂고 매주 하나씩 불을 밝히는데, 둥근 화환은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양초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촛불은 매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빛을 발하는데

▹대강절 첫째 주일-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보라색)

이는 임마누엘의 메시아가 올해도 반드시 이 누추한 땅에 새로운 감격으로 성탄하시기를 소망하며 밝히는 간절한 기도의 촛불입니다. 그래서 이 첫 주간에는 이사야 11:1-10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대강절 둘째 주일- 회개와 평화의 촛불(보라색)

이는 성탄하실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 위해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자신을 더욱 비우므로 주님과 깊이 화해한다는 의미의 촛불입니다. 이 둘째 주간에는 마태복음 25:41-45, 5:13, 요한복음 8:12을 읽습니다.

▹대강절 셋째 주일- 사랑과 기쁨의 촛불(핑크색)

주위의 이웃들, 상처 입은 자, 굶주린 자, 환자들, 시설에 있는 자들, 독거노인들, 소년소녀 가장들을 찾아보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며 올해도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전하리라는 다짐의 촛불입니다. 이 주간에는 마태복음 25:34-40, 누가복음 1:46-56을 읽습니다.

▹대강절 넷째 주일- 만남과 사랑의 촛불(보라색)

대강절 마지막 주로 성탄하신 아기 예수님을 꼭 만나 사랑이신 그분을 온몸으로 뜨겁게 체험하게 되길 기대하는 의미의 촛불입니다. 이 마지막 주간에는 이사야 7:14과 누가복음 2:1-10, 에베소서 2:13-14을 읽고 묵상합니다.

▹성탄절- 감사와 환희의 아기 예수 촛불(흰색)

성탄절 당일 아침에는 네 개의 촛불 화환 한가운데 또 하나의 촛불을 밝힙니다. 이는 그날 새벽 성탄하신 아기 예수님을 축하하고 진심으로 환영하는 촛불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에는 누가복음 2:14, 요한복음 3:16을 읽습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매년 새롭게 성탄하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끝납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

이게 바로 성경의 결론이자 기독교의 결론입니다.

실수로, 우연히 주님을 만날 사람은 없습니다. 올해도 주님은 반드시 기다리는 자, 준비된 자에게 성탄하실 것입니다.

겨울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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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밤 온다던 첫눈이 소설(小雪)을 지나 어제서야 내렸습니다.

이 나이에도 <첫눈!>하면 심쿵하는 건 대체 뭘까요?

정호승 시인은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하는 것일까 /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첫눈 오는 날 만나자)라고 했는데, 제 생각에는 첫눈이 우리 모두를 동심으로 데려가기 때문인 듯합니다.

어쩌면 첫눈은 우리 모두의 아련한 향수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래 잊고 살아 온 옛 시간이며 옛 친구들을 소환하여 잠시나마 추억과 그리움에 잠기게 합니다. 첫눈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총 앞에서 경건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더구나 요즘처럼 어려운 때 저렇듯 펑펑 첫 눈이 내리면 그 숭고한 자연의 스펙터클 앞에서 환희를 느끼지 않을 강심장이 있을까요?

아무리 메마른 사람이라도 첫눈 오는 날 마음속으로 <아, 눈이다!>하고 소리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올해도 저 풍성하게 내린 첫 눈에 부끄러운 것, 아쉽고 속상했던 모든 걸 다 묻어 버립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밤이 있고, 겨울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일을 믿고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도 부끄럼 없는 새 날을 맞기 위해 모든 때 묻은 것, 추하고 더러운 허물들을 훌훌 다 털어 버리라고 합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무들이 그 화려했던 잎사귀들을 모두 늦가을바람에 날려 버리고 매서운 겨울 추위를 준비하듯 우리 인생도 어떤 역경이 닥칠 때 오히려 그 위기를 이용해 자신의 삶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깨끗이 정리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사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때 묻은 삶이나 타성에 젖은 습성들을 떨쳐버리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오고 시련이 닥치면 지금까지 당연시되던 모든 게 그 뿌리째 다 흔들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밤을 이용해 인박힌 방탕과 술주정, 호색과 싸움, 시기 등을 모두 시련의 바람에 날려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놓아버리고 떨쳐 버리라고 한 것은 사실 보다 더 든든한 것, 보다 더 소중하고 참된 것을 붙잡기 위해섭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씀인데, 실은 이게 그의 모든 권면의 초점입니다. 확실히 지금은 낮이라면 해가 기우는 황혼이요 계절이라면 한 해가 저무는 겨울의 문턱입니다. 첫눈도 좋고 낭만적이지만 과연 나는 이 겨울바람에 날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듯 든든히 붙잡고 있는가? 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확인이 더 절실한 때입니다.

겨울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이 11월 하순, 다들 따뜻한 빛의 갑옷인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ET 할아버지

경기도 가평 두밀리라는 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안학교인 <두밀리 자연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장이셨던 채규철(1937-2006) 박사님은 <ET 할아버지>였습니다. <ET>란 <이미 타버린 사람>이란 말을 아이들이 그렇게 희화한 것이지만 그 분은 실제 외모도 영화 <ET>의 주인공을 연상케 할 만큼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오죽하면 처음 그를 본 아이들이 괴물이라며 달아나기까지 했을까요? 그는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난 50여 년 전 이미 덴마크에서 유학을 하고 박사학위까지 얻어 귀국한 후 당시 복음병원 원장으로 계시던 장기려 박사님과 함께 우리나라 국민의료보험제도의 효시인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도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연 선구자입니다.

그런 그가 1968년 어느 날 고아원 건물에 페인트칠 봉사를 하기 위해 소형 트럭에 페인트, 신나와 같은 인화성 물질을 가득 싣고 비탈길을 오르다 그만 그 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폭발하여 함께 타고 있던 두 사람은 사망하고 채교장 선생님은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겨우 목숨만을 건집니다. 그러나 코도 녹아내리고, 귀도 타버리고, 눈은 한 쪽만 남았는데 겨우 사물의 윤곽만 알아볼 수 있는 상태였고, 양손마저 오그라들고 말았는데 성형수술을 38번이나 했음에도 얼굴은 여전히 흉측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도 절망스러워 몇 번이고 죽음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평생을 차가운 교회 바닥에 엎드려 <우리 규철이를 이 민족의 모세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다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실패하곤 했는데, 그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기도 중에 그런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일어나 1975년에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결성했고, 1986년에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쳐 <두밀리 자연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자연과 인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분은 생전 여러 곳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는데 그분이 강단에 서면 언제나 장내가 숙연했습니다. 그는 늘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흉측한 사람을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과 함께 <저는 제게 흐릿하나마 이렇게 한 쪽 눈이라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은 할 수 있도록 성대를 지켜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귀는 떨어져 나갔지만 고막이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카락은 다 타고 조직은 파괴됐지만 뇌는 상하지 않아 정상적으로 사고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제 정신으로 기도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하는 말로 강연을 시작합니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두밀리 자연학교 채규철 교장 선생님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처럼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참 기쁨은 삶의 감격에서 오고, 삶의 감격은 반드시 은혜요 은총이라는 깨달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바울도 <네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만, 우리는 소중한 것일수록 다 하나님께 거져 받습니다. 내 생명도, 심장도, 부모도, 자식도, 공기도, 햇볕도,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너무 소중해서 뭣하나 값을 주고 사거나 내 재주로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을 거져 받았을 따름입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에 인색하지 맙시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믿음을 더욱 풍성하게 가꾸어 갑시다. 갈수록 팍팍한 삶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격려를 잊지 맙시다. 감사를 표현하는 일에 너그러운 사람에게 하나님은 보다 더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1992년 가을, 두 차례 강연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던 <ET 할아버지>, <감사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추수감사절 아침입니다.

Let's go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목사님이 지난 달 22일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래의 글은 유족들이 목사님의 소천을 알린 부고의 일부입니다.
<... 우리 가족은 그가 어떤 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들었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낙원의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버지는 처음 오순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몇 마디는 그가 누구에겐가 방언으로 말하더군요. ... 오, 세상에 ...! 아버지는 자주 미소를 지었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환한 표정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Let’s go”(자, 가자!)였습니다. ...>
자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안내하기 위해 온 천사들에게 말하듯 피터슨 목사님은 그렇게 임종을 맞았습니다.
사실 그는 평신도들보다도 지구촌 여러 나라의 목회자들에게 보다 많은 영향을 미친 분입니다. 그래서 흔히 그를 <목회자들의 목회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1932년 미국 워싱턴주 이스트 스탠우드에서 태어나 1958년 미국장로교단(PCUSA)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59년 뉴욕 신학교에서 성경 원어를 강의하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는 캐나다 벤쿠버의 리젠트 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강의하는 한편, 1962년 메릴랜드주의 작은 마을인 벨에어에서 <그리스도 우리 왕 장로교회>를 개척해 29년 동안 성실하게 사역한 대단히 모범적인 목회자였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인의 일상적인 언어로 신구약 성경을 새롭게 번역한 <메시지>를 비롯, 영성과 제자도에 관한 <한 길 가는 순례자>, 예레미야서를 대중적으로 재해석한 <주와 함께 달려가리라>, 다윗의 인간적인 모습을 조명한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사랑하는 친구에게>, <응답하는 기도>, <이 책을 먹으라>, <그 길을 걸으라>,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 <물총새에 불이 붙듯> 등 30여 권이 있으며 그의 대부분의 책들이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도 크게 존경받아 온 목회자이자 영성 신학자였으며, 시대와 싸우는 전사, 뜨거운 가슴을 가진 예언자, 때로는 감수성과 풍부한 언어를 구사한 시인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사랑받아온 저작자이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그는 기독교의 영성을 오늘의 언어와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은사를 가진 목회자였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논리적이고 비평적이었다면 유진 피터슨의 설교는 다분히 시적이고 서정적입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절대 성경을 비켜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피터슨 목사님의 설교집인 <물총새에 불이 붙듯>이라는 책은 제목부터가 시적이듯 거기에 실린 설교들도 다 그렇습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서정적이지만 결코 우회하는 법 없이 거의 직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들은 무엇보다도 성경본문에 충실합니다. 예를 들어 <물총새에 ...>나오는 모세와 함께 설교하기 파트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시내산에 오른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이내 조급함을 드러낸 백성들에 대해 모세는 그들이 애굽에서 쉼 없이 강제노동만 했던 탓이라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비움>이라고 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모세는 똑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도록 먼저 자신을 넉넉히 비우라는 것입니다.
<피터슨 목사님,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주님 품에서 편히 쉬십시오!>.

루터와 이발사

사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또 누구에게나 어려운 게 바로 기도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듯이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어려움이 적지 않은 게 기도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듣고 계신지 확신이 서지 않아 마냥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몇 마디 하고나면 금새 할 말이 바닥나 난감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또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전혀 집중이 되지 않고 온갖 혼란스런 잡념만 머리를 가득 채울 때도 많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어본 것이고 고민해본 문제일 것입니다.
말을 배우는 아기가 엄마의 말을 따라하듯이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 역시도 반복해서 훈련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언제나 깊이 있는 신학적 주제들을 평신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책을 써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 R. C. 스프로울이 어린이들을 위해 썼다는 이 <루터와 이발사>(홍종락 옮김, IVP)라는 책도 바로 이런 기도에 관한 문제를 돕기 위해 그의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발휘한 작품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이발사 페터 사이에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세밀한 상상력과 캐릭터에 살을 입히고 생기를 불어넣는 작가적 기질까지 잘 드러낸 이 책은 T. 라이블리 플루하티의 따뜻하고도 유쾌한 삽화가 더해지면서 기도에 관한 영적 지혜가 정말 어린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누구나 루터와 이발사 페터 간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기도도 배우게 되고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의 의미와 중요성도 깨닫게 됩니다. 다만 그림책이어서 어린 아이들만을 위한 책, 단순하고 쉬운 책이라 여기기 쉽지만 이 책은 일반적인 그림책과는 달리 마르틴 루터와 그의 종교개혁에 관한 설명까지도 생략하지 않는다는 것과 독자들을 보다 깊이 있는 기도생활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아이들보다는 청소년 이상의 초신자 혹은 기성 신자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실제 아마존에 올라온 서평이나 댓글들을 봐도 처음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사지만 정작 아이들은 어려워하고 오히려 부모들에게 도움이 됐다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루터 박사님, 저는 박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압니다. 오늘 제 이발소를 찾아 주셔서 큰 영광입니다. 박사님, 이렇게 뵌 김에 제가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제게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매일 밤마다 기도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가끔 제가 하는 기도가 천장에 막혀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박사님은 매일 여러 시간 동안 기도하신다니 기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루터 박사님, 제가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나요?>
<아주 훌륭한 질문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생활에 대해서는 아주 어려운 질문을 던지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묻지 않더군요. 더 깊이 기도하고 싶으시다니 제게는 더없이 기쁜 일입니다. 제 연구실로 돌아가서 생각해보고 페터씨의 기도생활을 도울 만한 실제적인 방법들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19쪽).
그래서 루터가 돌아가 이발사 페터를 위해 쓴 기도 지침서가 바로 <간단한 기도법>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 책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기도문과 하나님이 직접 두 개의 돌판에 적어주신 십계명,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원초적인 고백인 사도신경을 한 구절 한 구절 적용하며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 누구나 깊이 있는 기도를 하게 되며 또 하나님과 보다 진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고 확신 있게 권면합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아 일찍이 마르틴 루터가 이발사 페터에게 가르친 <간단한 기도법>이 오늘 우리의 기도 내용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가을 기도

우리는 요즘 기도를 잊어버렸습니다.

기도가 많이 낯설어 졌습니다.

바쁜 일상 때문이기도 하고, 그저 어려울 때만 절실해지는 탓에 기도가 정말 생소해졌습니다.

믿는 자는 곧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 만인이 기도하는 집인데 이제는 교회에서 기도가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습니다. 갈수록 기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현실이 쓸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십시오> 하고 시작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도 실은 <가을 기도>였습니다.

뜨거웠던 지난 여름을 회고하며 잘 익은 바람의 향기와 함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겁니다. 이렇듯 수도사와도 같은 청빈한 영혼으로 자신을 비우며 마치 긴 편지를 쓰듯 맑고 깨끗한 기도를 드리면 우리의 영성도 가을 하늘빛처럼 투명해지고 더욱 깊어집니다. 릴케의 이 <가을날>은 그가 체코의 프라하 대학에서 독일의 뮌헨 대학 문학부로 옮긴 후 낸 생애 첫 시집인 <기도 시집, 1905>에 실린 시로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시적 언어로 옮긴 <기도문>이자 하나님을 향한 치열한 날갯짓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남은 과일들이 무르익게 하시고 / 이틀만 더 햇빛을 주사 / 그것들이 다 제 맛을 내게 하시고 / 진한 포도주의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시인은 가을 햇볕 속에서 익어가는 과일들의 완숙을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과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을 기도>가 소중한 것은 과일 내음 그윽한 잘 익은 신앙의 열매, 성령의 열매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요 15:8)고 하셨습니다.

릴케는 가을날 느끼는 서정에 열매와 결실을 더해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삶의 깊이를 근원적으로 성찰한 고독과 우수의 시인이었습니다. 이렇듯 <가을 기도>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가꿀 수 있는 겸허함이자 경건함입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입니다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을 것입니다 /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 /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며 /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 일 것입니다>

릴케의 운명의 겨울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습니다. 흔히 그가 장미 가시에 찔려 사망했다고 하지만 실은 백혈병으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1926년 12월 29일 새벽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스위스 라롱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묘비 역시 그가 유언장에 남긴 그대로 옮겼습니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며,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자신의 운명의 겨울을 준비하는 엄숙함이 바로 오늘 우리의 진정한 <가을 기도>입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

저는 명색이 목화자면서도 늘 가슴에 품고 사는 노자(老子)의 경구 하나가 있습니다. 도덕경에 나오는 <공성이불거>(功成以不居)라는 말인데, <공을 세우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야 그간 이룬 공이 없어 그 속에 머물고 말고 할 주제도 못되지만 70년대 후반 함석헌 선생이 명동 가톨릭 여성회관에서 노장(老莊)을 읽어줄 때 들은 그 오자성어만큼은 지금까지도 제 삶의 좌우명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유교나 또 잘못 해석된 우리 기독교의 도그마에 비해 얼마나 더 시원하고 통쾌한지 모릅니다. 가끔 도덕경 앞에서면 제 모습이 더 작아지고 기독교 신자로서, 또 목회자로서의 제 몰골이 많이 옹졸하다는 느낌이 들어 부끄러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없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 4:36-38). 주님의 이 말씀은 지금 우리의 삶이 무엇 위에 서있고, 내가 내 삶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이유가 뭣인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지난 주 한글날 저녁 방송된 MBC PD수첩 <명성교회 8백억의 비밀>이 기록적인 시청률(7.6%)을 자랑하며 또 한 번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교회 세습은 결국 공로 싸움입니다.

<내가 심은 것이니 반드시 내가 거둬야겠다>는 철저한 이기심과 장삿속이 전제된 작태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홀로 누리는 기쁨만이 있을 뿐 남과 함께 나누는 더불어의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교인이 자신의 수확물이고 오늘의 성공, 오늘의 명예, 오늘의 지위와 부가 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에 세습이야말로 당연한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 쳐놓은 공로의 그물에 웅크리고 앉아 거기에 걸려드는 먹잇감으로 사는 사람을 <거미형의 인간>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생 공을 들이고도 누가 마다하거나 때가 됐다 싶으면 아무런 미련도 없이 훌훌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은 <나비형의 인간>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자기가 세운 공로에 연연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 이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에 더 오래도록 남습니다. 주님도 거두는 자의 보람보다 심는 자의 기쁨이 더 크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나 홀로의 기쁨이 아니라 더불어의 기쁨이어서 그렇습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는 행복, 내가 뿌리는 것을 남이 거두며 기뻐하는 것에 참여한다는 것은 실로 삶의 큰 환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단순히 심고 거두는 그 자체보다도 너를 만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지금의 내 삶도 실은 내가 심어서 거둔 게 아니라는 자각이며, 나 또한 받은 자로서의 감격과 기쁨 때문에 다시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거두는 것을 목표로 삼거나 권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도 거저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는 일에서 이미 거두는 자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심은 것을 거두고 당신은 내가 심은 것을 거두고!>

여기에 바로 보람과 기쁨에 찬 상생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내가 심은 것이니 나와 내 자식이 거두겠다는 것은 당연지사고, 문제는 너 심은 것까지도 내가 거두되 수백 배, 수천 배까지도 수확하겠다는 데서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와 교회 현장이 극도로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이제 목회자도 더럽게 늙지 않기 위해 <공성이불거>를 염불처럼 외며 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쑥과 마늘

이육사의 시 <광야>는 태고의 바람소리처럼 이렇게 시작합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4351년 전 처음 한반도의 하늘이 열리던 날도 올 개천절처럼 그렇게 한없이 푸른빛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민족의 개국을 <하늘이 열린 사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고조선의 창건이 곧 <하늘의 뜻>이었음을 선포한 민족사적 자부심의 발로일 터.

13세기 고려의 승려였던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설화는 참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정신세계, 세계관 등을 두루 함축하고 있어서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소중한 정신적, 문화적 자산이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충족시켜야 했던 세 가지 조건은 오직 쑥과 마늘만 먹을 것, 굴속에서 지낼 것,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을 것 등이었습니다.

우선 짐승이 사람이 된다는 설정은 윤회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곰과 호랑이의 대결에서 곰이 이겨 웅녀가 되었다는 것은 고대 모계사회의 문화인류학적 흔적을 말해 주는 것인 동시에 곰을 섬기던 토템족이 호랑이를 섬기던 토템족을 이기고 고조선 창건의 주체세력이 되었음을 밝히는 신화적 진술일 것입니다.

또한 곰이 굴속에서 오직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을 지냈다는 것은 당시 고조선이 지향한 이념적 실체를 대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종족이나 부족들과 피 흘리며 싸우기보다는 우주의 정기가 응집된 자연의 진액을 빨며 살고자 했던 순수 평화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밤중 으슥한 곳에 숨어 남의 생명을 노리는 호랑이 같은 성정의 폭력적 인간은 경멸한다는 속뜻도 담겨 있습니다. 쑥과 마늘은 고대로부터 영험한 약초로 널리 알려져 온 식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은 남과 싸워서 뭔가를 빼앗기보다 오직 자연의 내공만으로 살고자 했던 생명 공동체의 원조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캄캄한 굴속에 들어가 자신의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 없이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호랑이처럼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굴 밖으로 뛰쳐나갈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은 더 이상 고통의 연금술을 배울 수 없습니다. 부부도, 부모도, 연인도, 친구도 도와줄 수 없고 오롯이 나만이 홀로 고통 앞에 서서 동굴의 어둠을 온 몸으로 견뎌야 하는 인고의 시간, 그 처음 하늘이 열리고 환웅이 내려와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시작한 백두산 신단수가 지금은 북한에 있을 뿐 아니라 언제부턴가는 그 절반이 아예 중국 영토로 편입되어 남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우리 민족의 원적지가 사연도 모른 채 남의 손에 넘어가 다른 나라 땅이 됐다니 생각할수록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단군>이란 본디 고대 북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하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던 제사장, 즉 <탕구르>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따라서 <단군>의 진정한 사명은 민족 공동체가 겪는 아픔을 하늘의 힘을 빌어 풀어주고 백성들 앞에 정신적인 좌표를 제시하는 데 있었으며, 개천절 또한 바로 그런 제사장의 출현과 <하늘의 열림>을 기뻐하며 벌이는 감사의 축제였던 것입니다.

단촐한 옷차림에 아주 느린 기차를 타고 저 가을이 오는 길목을 향해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강이며 정겨운 이 땅의 가을 풍경을 가득 가슴에 담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쑥과 마늘만 있으면 백일 동안은 너끈히 살아남는 우리 민족의 산하를 그렇게 다시 한 번 굽어보고 싶습니다.

대화

하늘이 더욱 높고 투명해졌습니다.

나뭇잎 새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한결 그윽해진 가을 냄새를 맡습니다.

길었던 추석 연휴 가족 친지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셨나요? 혹 칼보다 더 날카로운 세치 혀에 베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지는 않으셨나요? 흔히 명절 때 모여 시사나 정치 얘기로 갑론을박하다 뒤끝 씁쓸하게 헤어지는 예가 많아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끝없이 대화하고 토론하는 민족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들은 가족 간의 대화를 중시합니다. 서로간의 사랑을 느끼고 교감하며 각자의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다고 믿기에 그들은 부모와 자녀, 형제 자매간의 대화를 학교 공부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들의 오랜 지혜서인 <탈무드>도 삶의 온갖 주제들을 놓고 벌이는 랍비와 제자들 간의 대화집이요 토론집입니다.

유대 랍비 출신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가족 상담가로 유명한 슈물리 보테악이 쓴 <유대인 가족대화>를 보면 그들은 어린아이가 실수로 집안의 물건을 깨뜨렸을 때도 야단을 치는 대신 왜, 어떻게 해서 그랬는지를 물으며 대화부터 시작합니다.

<어쩌다 깨뜨렸니?> <꽃병에 물을 채우려다 그만 손에서 놓쳤어요!> <그렇구나! 괜찮다. 꽃병이 손에서 미끄러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알겠니?> 이처럼 유대인들은 실수한 아이를 격려하며 스스로 잘못된 이유를 깨닫도록 해 아이로 하여금 그 실패의 경험을 통해 삶의 소중한 교훈을 얻게 합니다.

슈물리 보테악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유대인들의 독특한 <하브르타> 공부 방식의 핵심도 대화식 교육에 있다고 합니다.

지난 세대 사람들인 존 록펠러,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버트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은 두고라도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만들었고, 마크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을 만들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ET>와 <쥬라기 공원>을 만들었고,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를, 윌리엄 로젠버그는 <던킨 도너츠>를, 래리 엘리스는 <베스킨 라빈스>를, 밀턴 허쉬는 <허쉬 초콜릿>을 만들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창업하고 <아이폰>을 만들었고,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구글>을 공동 창업했고, 포크 가수이자 시인인 밥 딜런은 20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세계인들의 일상을 바꾼 이들의 공통점은 다 유대인들이요 대화와 토론, 강연의 명수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 뿐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지만 미국 500대 기업의 간부 41.5%(인도계10%, 중국계5%, 한국계0.3%), 미북동부 8개 명문 사립대학을 뜻하는 아이비리그 졸업생의 40%, 노벨상 수상자의 22%, 노벨 경제학상 42%, 세계 억만장자의 30%, 미국의 최고 갑부클럽의 45%, 하버드대 재학생의 30%(한국계250-300명 수준으로 약 1%), 예일대 대학원생의 60%, 미 대학교수의 35%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자랑하며 인류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의 독보적 민족으로서의 자리매김을 굳건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슈물리 보테악은 유대인들 중 그 누구도 그런 성과물들을 의식하거나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저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의 신앙과 삶의 자연스런 열매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교육을 영성교육(쉐마, 토라), 지혜교육(탈무드), 인성교육(가족간의 대화)으로 요약했는데, 그들은 지금도 안식일인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는 무조건 쉬며 온 가족이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함께 기도하고 식사하고 긴 대화를 나누며 그들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켜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도 남북간, 또 북미간의 대화가 잘 이뤄져서 하루 속히 민족의 화해와 통일, 그리고 지구촌의 평화와 상생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세습

한반도는 세습 천국입니다.

지구촌 대부분의 국가들이 선거를 통해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뽑는 마당에 이 무슨 왕조사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짓인지 북한은 벌써 세습 3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 우리의 사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과연 북한의 3대 세습을 욕할 자격이나 있나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한 해 매출이 우리나라 국가 예산을 가볍게 넘어서는 이 땅의 재벌 기업들은 하나 같이 세습으로 그 총수직을 대물림했습니다. 벌써 북한 같은 3대 세습 총수도 나왔지만 회사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고 세습했다고 누가 그 재벌사를 욕하는 경우도 보지 못했습니다. 기업과 국가가 같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재벌 기업들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국민 경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재벌 기업쯤 되면 준국가라고 봐도 가히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굴지의 언론사들도 마찬가집니다. 북한의 세습에 대해 <북한 주민은 주권자가 아니라 김씨 일가를 영원히 모셔야 하는 종복에 지나지 않는다>며 비판했던 우리나라 최대 신문사도 현 사장이 4대째니까 북한의 3대 세습마저도 비웃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재벌과 언론사 외에도 또 하나 막강한 세습 집단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교회입니다. 독재자는 국가권력을 세습하고 재벌과 언론사는 부를 세습한다지만 세속 기관도 아닌 교회는 대체 무엇을 세습할까 싶은데 우리나라의 대형교회들은 1997년 서울 강남의 충현교회를 시작으로 2001년 광림교회, 구로중앙교회, 2008년 금란교회, 2013년 임마누엘교회로 그 세습전통이 이어지면서 현재는 전국에서 364개 교회가 세습으로 담임목사직 승계를 마무리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지난 주중 폐회한 우리 교단(예장 통합) 103회 총회 역시 최대 이슈는 <세습>이었습니다. 2013년 9월에 제정한 우리 교단 헌법 정치 제28조 6항입니다.

<해당 교회에서 사임 또는 은퇴하는 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 비속과 그 직계 비속의 배우자, 해당 교회의 시무장로의 배우자 및 직계 비속과 그 직계 비속의 배우자는 담임목사가 될 수 없다.> 이렇게 교단의 <세습방지법>이 엄연함에도 명성교회는 2017년 3월 19일 김삼환 목사의 아들 김하나 목사의 담임목사 청빙을 절대 다수의 지지로 결의했고, 11월 12일 김하나 목사가 전격 명성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동안 명성교회는 <김삼환 목사는 이미 2년 전인 2015년 은퇴를 했기 때문에 ‘은퇴하는’ 목사가 아니라 ‘은퇴한’ 목사이므로 김하나 목사의 담임목사 청빙은 위법이 아니다>고 주장했고, 이후 노회도, 총회 재판국도, 헌법위원회도 이를 추인하며 명성교회 측의 손은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이번 총회는 달랐습니다. 결국 새로 구성된 15명의 재판국원들로 하여금 명성교회 청빙 무효소송을 재심토록 결의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옛날 선교 초기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를 하다 세상을 떠나면 다시 그 자녀들이 우리나라를 찾아 와 그 선교사업을 세습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걸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보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세습이 문제가 될까요?

지금의 대형교회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고난과 희생이 아니라 다시없는 꿀보직의 승계이자 금수저의 대물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끊임없이 세속의 가치를 본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범은커녕 도리어 세상의 걱정거리, 비웃음거리가 된 것입니다.

모두가 두 눈 부릅뜨고 명성교회 재심결과를 지켜 볼 일입니다.

가을 채비

(119.194.29.232) 조회 수 0

밤새 천둥 번개가 치고 요란스레 비가 퍼부었습니다.
곳곳에서 물난리가 나고 온 세상이 비에 흠뻑 젖었습니다.
빗소리가 끊긴 새벽,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습니다.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음입니다.

몹시 힘들었던 폭염과 열대야 속에서도, 사나운 태풍과 집중호우 속에서도 이렇듯 계절이 다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요. 여름이 제아무리 무자비하다 해도 우주의 괘도를 도는 계절의 순리 앞에서는 결국 그 기세를 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저 시도 때도 없이 날뛰는 건 오직 우리 인간들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 며칠 간은 선풍기를 끄고 잤습니다. 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벌써 홑이불이 너무 얇게 느껴져 좀 포근한 이불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번 휴가는 당초 계획했던 제주도 길이 태풍에 막혀 퍼붓는 비,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뚫고 저 강원도 설악산과 충청도 청풍호를 다녀왔습니다. 설악산 신흥사와 권금성 쪽의 숲에서는 이미 가을 느낌이 묻어 났고, 청풍호 주변의 숲들과 나무들에서도 저만치에서 오고 있는 가을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을 채비는 산의 나무들에게도, 숲속의 풀벌레들에게도, 올 여름 모진 폭염을 견뎌낸 우리 사람들에게도 다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 위를 지나다 문득 동화작가 이수호님의 시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 수몰되어 물속에 갇힌 학교며 동네 위를 유람선을 타고 지나갔다 / 누구도 그 깊은 물속에 그런 마을이 있었다고 기억하지 않았다 / 세월의 흐름에 시대의 변화에 / 깊이 잠겨 있을 뿐이었다 / 두려웠다 / 우리도 그렇게 잠겨가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야말로 지금 현실을 핑계로 본래 품었던 믿음의 생각들이 차츰 둔감해져가고 변질되어 감에도 아무런 감각도 고민도 없이 도리어 편안해하며 추해져가는 자신의 몰골을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요? 요즘은 마음에 깊이 품고 남을 사랑하는 일이 아주 구식이 된 시대입니다. 온통 잠깐의 흥미로운 대상을 고르는 일이 세상을 주도하는 세태가 된 것입니다. 묘하게도 몸을 겹겹이 감싸던 시대는 상대에 대한 마음이 깊었지만 노출이 일상화된 요즘은 드러난 몸이 일차적 목표가 된 문화입니다. 그래서 심지 깊은 사람을 보기 어렵고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또한 만나기가 힘들어 갑니다. 부디 짙게 화장한 이 시대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기를 빕니다. 가을바람처럼 창문 너머 그대의 방을 가득 채우고 비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감사와 감격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그리워지길 기도합니다. 현실이 견고하게 짜놓은 성곽은 안전판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탈출하지 못하게 가두는 영혼의 감옥이 되지만 초월과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우리에게 상상 이상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곤 합니다. 이번 가을에는 비 내린 다음 날 오후처럼, 바람 선선한 깊은 산 맑은 물처럼, 깨끗한 하늘 빛 영성이 성큼 우리 안으로 들어왔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자유로운 영혼

매미 소리가 갈수록 치열합니다.
폭염이 절정으로 치닫는 요즘 마치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밤낮으로 토해내는 뜨거운 자연의 소리에 차라리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최근 시중 유명 서점의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50-60대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소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중장년층들의 자유인에 대한 동경과 아쉬움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더 늦기 전에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물론 배부른 노예와 가난한 자유인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웠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노예가 되어 있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실은 더 심각한 노예가 되어 있다.>
이 도발적인 글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불을 지핀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첫머리입니다. 루소의 이런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상이 대혁명의 불씨가 되어 이름 없는 민초들이 일어나 부패한 권력자를 그 권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 이후 인류는 실로 많은 영역에서 자유를 쟁취했습니다. 신분제와 노예제 폐지는 물론 오늘날 대다수 문명국가 시민들이 누리는 인권, 사유 재산권, 선거권,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과 같은 권리들이 다 불과 수 세기 사이에 주어지고 보장된 자유의 산물들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정말 자유로울까요? 애석하게도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힘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진보를 눈부시게 이룩한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과거에는 주로 군주들의 폭정과 착취, 종교적 도그마, 가부장적 전통과 일방적인 사회 규범 같은 게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제한했다면 지금은 기득권 세력들의 횡포와 사람들의 탐욕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내팽개친 채 오로지 소유에만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당부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지금 자유합니까? 정말 그 어떤 것의 노예도 아닙니까? 놀랍게도 신앙생활 자체가 때로 우리를 비굴하게 하는 현실을 봅니다. 이건 대체 뭡니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렇게 자유를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통쾌한 일침을 가합니다. 소설의 화자가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우연히 조르바를 만나는데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르바의 첫 인상을 묘사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 조르바는 살아 있는 가슴과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모태인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채 끓어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조르바를 정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자유>입니다.
그는 전통과 관념과 사회적 규범을 넘어선 진정한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조르바의 인생관은 <앞뒤 재지 말고 일단 해보자!>입니다. 조르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확대경으로 물속을 들여다보면 균들이 우글거리지요. 그걸 보고는 못 마시지 ... 그러나 안마시면 목이 타고 ... 확대경을 부숴버려요! 그럼 균들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도 번쩍 들 테니까 ...!>

올 여름 휴가 때는 저도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훨훨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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