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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오동성 플러스친구친구 199

오동성 목사의 "깊은산에서 오는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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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1일부터 메시지를 발송하지 못하게 됩니다.

매일 찾아오는 <<깊은산에서 오는 편지>>와 이야기, 어떠신지요?^^ 플러스친구 메시지가 유료화되었는데 제가 외국에 있어 유료 메시지를 사용할 수가 없어 당분간 메시지로는 발송해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계속 이곳에서 이어가고 있겠습니다. 수고스럽지만 가끔 여기 플러스 홈을 찾아주시고 혹시 '일반 카톡'으로 편지를 받기 원하시는 분은 카톡 아이디나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단톡방에 초대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처럼

다들 예루살렘으로 떠나가는데 눈먼 거지는 여리고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눈이 멀어서 구걸하고 있었지요. 앞을 보지 못하니 요구만 하면서 만족하지 못하게 삽니다. 눈을 뜨면 다 되어 있는 부족함이 없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다 못하고 죽을 것이고 한걸음만 옮기면 이루어지는 꿈인데 늘 주저앉아 있지 않은지 여리고 길가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이 되어 봅니다. 그래도 이렇게 들을 수 있으니 좋지요. 또 그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소리를 질러보고, 누가 뭐라고 하면 더 소리를 지르고,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는 힘이 있는 오늘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말씀을 만나니 참 행복합니다. 그런 여리고를 지나면 드디어 예루살렘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맞이했다고 해서 그날을 종려주일로 기념하기도 하지요. 예루살렘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그를 따라 오늘도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18)

그가 가신 길을

바디매오가 다시 보게 되는 것은 그가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지요. 물론 예수께서 지나가셨고 물어주셔서 가능한 일이지만 지나가시는 예수를 멈추게 하고 물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디매오의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당시에 많은 죄인들, 병자들이 있었지만 바디매오에게만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드디어 바디매오도 여리고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께서 가시는 그 길을 따라 갑니다. 나보다 앞서 내가 가야할 길을 가신 그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앞서 가시는 내가 가는 길이 곧, 하나님이 가시는 길입니다. 내가 사는 하루는 하나님이 사신 하루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캐나다 땅에 오셔서 학교를 다니시고 학원을 하시고 양로원을 운영하셨으니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다 선물이지요.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오늘 가는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한 번도 나를 떠나신 적이 없으신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이제 일어나 그 길을 갑시다. 길은 가라고 있습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15)

구걸하는 이유

다가온 바디매오에게 예수께서 물음을 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있어야할지를 아시지만 물으십니다. 부모도 자녀의 필요를 알지만 원하는 것을 먼저 들어주지요. 물론 아무리 원해도 있지 말아야할 것은 주지 않지만 그것은 부모만이 아는 사랑입니다. 오늘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릅니다. 구걸하던 바디매오는 눈을 뜨고 싶다고 간청합니다. 그가 구걸하면서 길을 떠나지 못하고 앉아 있는 것은 눈이 멀어서 그렇습니다. 눈을 떠 볼 수 있으면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주어져 있으니 구걸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소풍가는 날 아침이면 비가 옵니다. 그러면 우리들 대부분은 그 비가 주는 선물과 은혜를 보지 못하고 하늘을 원망을 합니다. 왜? 소풍가야한다는 조건과 생각이 우리 눈을 가려서 비를 맞이하는 선물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뜨면 비를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14)

겉옷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소식을 듣자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고 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껍데기를 둘러쓰고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지요.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잘 때는 담요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겉옷이 없으면 사막의 추위를 견딜 수가 없는 필수품이었습니다. 구걸하는 거지에게는 목숨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디매오처럼 때가 되면, 일을 할 순간이 오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온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 내가 벗어 던져야할 겉옷은 무엇입니까? 그래야 눈을 뜰 수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내어 놓는 것입니다. 깜깜한 밤에 길을 가다가 발을 헛딛었지만 다행히 나뭇가지를 붙잡은 사람이 밤새 매달려 기도했다지요. 살려달라구요. 그러자 하나님이 나뭇가지를 붙잡은 손을 놓으라고 하십니다. 구해주겠다구요.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것은 다 하겠지만 그것만은 못하겠다며 죽기살기로 아등바등 매달려 있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바로 발아래가 땅인 것이 보입니다. 그 손을 놓았으면 밤새 그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지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께 나오는 바디매오와 같은 결단과 힘이 오늘 여리고를 떠나는 우리와 함께하기를 빕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13)

20190504(#남미 5일) Puerto Iguazu - 야간 버스 : 악마의 목구멍

● 20190504(#남미 5일) Puerto Iguazu - 야간 버스 : 악마의 목구멍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 타운인 푸에르토 이과수에서 폭포로 가는 일반적인 방법은 버스 터미널에서 '리오 우르과이' 버스를 타면 됩니다. 160페소, 4000원 정도 합니다. 물론 택시로 가도 되지요. 숙소에 준비된 빵과 커피로 아침을 하고 짐을 맡기고 오늘도 서둘러 출발합니다. 어제 석양이 짙더니 하늘이 흐려서 조금 아쉽지만 설레는 마음입니다.

공원에 도착해 공원 입장료 700페소를 내고 들어가니 정글 보트 투어 매표소가 보입니다. 2000페소네요. 5만원 정도입니다. 19시간 동안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야간버스 요금으로 2400페소를 쓰고 나 잠시 망설였지만 보트 투어는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투어가 2시간이 걸린다고 해 마음에 걸립니다. 이미 오후 5시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가는 버스를 예약해 놓아 아슬아슬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었지요.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는 트레일이 다양하고 규모가 커서 며칠을 머물며 즐기도 한다고 합니다. 기차를 타고 메인 폭포인 '악마의 목구멍'까지 가는 트레일이 1시간, 폭포 아래 가까이 접근하는 lower trail이 1시간, 폭포 위에서 전망하는 upper trail이 1시간 정도 기본으로 소요가 되니 보트 투어까지 총 5시간은 잡아야했지요. 중간에 식사를 하고 쉬는 시간을 포함하면 6시간은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보트 투어를 하고 나면 옷이 다 젖을테니 트레일을 걷는 동안 옷이 대충 마르도록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먼저 보트 투어를 신청하고 시작했습니다. 오전 일찍은 단체 버스들이 많이 와 기차 타기도 어렵다고 하지요. 공원에서부터 오프로드 트럭으로 정글 투어를 마치고 보트 투어로 안내는 가이드가 “Are you ready to shower?(샤워할 준비 되었나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샤워가 아니라 목욕통으로 물을 쏟아 붓더군요. 수영복을 입고 보트를 타는 게 좋겠습니다.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다지요. 물론 3시간 걷는 동안 거의 마르긴 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민망할 수도 있어서 그렇지요.^^ 2시간 정글 보트 투어보다는 1시간 보트 투어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글 투어가 그냥 트럭타고 오프로드길 가는 거라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5월은 비수기여서 그런지 보트 투어만 따로 없었습니다. 보트 투어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나 같은 코스입니다. 일정에 맞게 선택하면 될 것 같습니다.

보트 투어는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도 보트를 타고 폭포 아래로 가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의 차이듯이 이과수도 그렇습니다. 또 훨씬 원시적이고 박력이 넘치네요. 급류를 타며 폭포 아래로 들어가니 내려다보던 폭포물이 머리 위로 쏟아집니다. 그 장대함에 감탄하다가 물벼락을 맞고는 혼비백산하기도 하구요. 그리고 생활방수를 자랑하는 갤럭시 S9+ 스마트폰의 덕을 이번에는 톡톡히 보았네요. 쏟아지는 폭포 아래서도 사진과 동영상을 건져 주었습니다. 가져간 Dslr 카메라는 투어에서 나누어 준 방수 가방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답니다. lower trail과 upper trail도 아주 좋았습니다. 어제 브라질 쪽 트레일이 주던 인상의 10배 정도라고 할까요? 물론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다르긴 합니다. 브라질 쪽은 한방에 강렬하고 폭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면 아르헨티나 쪽은 다양한 폭포들이 여러 번에 나누어 인상을 주어 조금씩 적응을 하게 만들어준다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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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기)
http://sanmul.net/technote/read.cgi?board=art_album&y_number=464&nnew=2

외칩니다!

또한 바디매오는 외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듣고 가만히 있는 건 들은 것이 아니지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외치지 못합니다. 불쌍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불쌍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불쌍한지를 모르는 거지요. 그러니 외칠게 없습니다. 외치지 못하니 속이 썩어갑니다. 답답해지지요.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어도 바디매오는 자기가 불쌍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외치며 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외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부끄럽고 용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눈치와 체면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소리내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질타하고 비난하는 소리가 더 크지요. 아니, 내 스스로 나를 더 비난하고 질타하고 위축하게 합니다. 너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이 나이에 뭘 한다고. 그만 포기하지. 왜 이렇게 힘들게 사니? 할 수 있는 일, 그렇게 잘하던 일이 있는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두렵고 답답하고 암담합니다. 그러나 그 때 멈추면 시작하지 않느니 못합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을 때에 바디매오는 더욱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반응이 있을 때까지, 들릴 때까지, 이루어질 때까지, 돌아갈 길이 없는 배수진입니다. 바디매오가 더욱더 큰소리로 외치자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에게 말을 건네시지요. 하나님은 알아서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찾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주었지만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정말 원하는 것을 이루어집니다. 원하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않는 거지요. 정말 간절히 원하면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12)

잘 보고 합니다.

여리고의 바디매오는 눈이 멀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지만 귀는 열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나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큰 무리들을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여리고를 지나가고 계셨지요. 하지만 지나가기만 하십니다. 기회는 지나갑니다. 지나가는 기회를 잡으려면 들리는 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일어나는 일,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 마음에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또 내 생각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들어야지요. 사실은 다 이유가 있어서 있어나는 일입니다. 우연은 없지요. 내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고 내 생각이 좁아서 크게 보지 못할 뿐이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눈이 멀어 구걸하고 있지만 귀를 열어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거기서 시작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지요. 지금 어떤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어떤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까?(#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11)

길가에서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다 길을 가는데 길에 앉아 있지요. 왜? 구걸하느라요. 왜 구걸을 하나요? 눈이 멀어서 그렇습니다. 혹시 오늘 내가 그렇게 여리고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가 아닌지 돌아봅니다. 그렇게 길가에 앉아서 원망만 하고 있다면 눈이 멀어 있는 것입니다. 길을 가면 되는데 구걸하느라 앉아 있습니다. 공부하면 되는데 이 일 저일 간섭하는 딴 생각에 더 바쁩니다. 계획을 세우고 책상을 치우느라 시간을 다 허비하고 있지요. 다이어트를 하려면 달리기를 하면 되는데 달리기가 싫습니다. 다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만 말해야하는데 한국말이 자꾸 나옵니다. 미치는 것 같아도 고비를 넘겨야 하는데 그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옳은 일을 하면서 정죄하지 않으면 되는데 자꾸만 눈치보고 핑계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그런 나는 그저 여리고에 앉아만 있는 눈먼 거지입니다. 눈이 멀어서 구걸하면서 내게 있는 것을 주지는 못하고 늘 달라고만 요구만 하면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거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바디매오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걸하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설 수 있게 됩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10)

여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선택하신 예수는 여리고를 지나가셨습니다. 그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제자들, 무리들은 다 다른 생각과 기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생각이 다르다고 탓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계시지요. 오늘 우리가 가는 길도 그렇습니다. 같이 가지만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나도 그렇고 나와 함께 가는 동반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환경과 조건에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고 내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목적을 잃어버리고 허겁지겁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입니다. 가슴 뛰는 걸음이 아니라 아무 느낌도 없이 억지로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고달프고 의미가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캐나다에서 살면서 보는 외국생활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오고 싶었던 캐나다인데 막상 와보니 생각 같지 않지요. 그리고 넘어야할 산이 너무 험하니 다시 도망갈 자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으면 어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떠날 징조는 한가지입니다.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가장 절정인 순간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가서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캐나다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때는 캐나다에서 만족하는 순간입니다. 그 때가 돌아갈 때이지 캐나다 생활이 힘겹고 한국이 그리워 돌아가는 것은 악순환이라는 거죠.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 살고 있느냐는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길가는 목적으로 찾아서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내 길을 가는 것이지요.(#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9)

섬김

예수는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기억을 잃고 사는 지구별 사람들을 찾아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지요. 더 나아가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러 오셨다 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러 세상에 왔는지 돌아봅니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오셨으면 오늘 그리스도로 살기 원하는 나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이렇게 읽습니다. 나 깊은산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치사하게 따지고 계산하고 살아야겠습니까? 우리 요구와 대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먼저 섬기면 그 섬김이 나와 내 주변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힘으로 강압으로 억지로 되지 않는 삶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살아보면 왜 그 삶이 길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처럼 우리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살고 대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할 일을 하는 삶, 어떻습니까? 대가 없이 친절합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8)

으뜸이 되려면

말씀 앞에서 나는 으뜸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헤아려 봅니다. 그런데 그 최고의 지름길은 종이 되는 것입니다. 으뜸이 된다고 하여서 다른 사람을 누르고 세도를 부리는 것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한 없이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권력이 그렇지요. 미워하고 다투는 한 목마름이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사랑하며 섬기고 내어 주면 힘이 나고 찾아오는 평화가 있습니다. 내 손에 잡을 수 있는 것도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없고 그렇게 느껴져도 곧 목마른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섬김에서, 낮아지는 자리에서, 가진 것 없는 비움에서, 그런 여여함과 깨어있음으로 하여 진정한 삶의 해방과 자유, 으뜸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입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7)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그러면 누가 종이고 누가 주인일까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기려 하는 한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사람의 뜻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뜻이 아무리 선해도 그것은 '상대'입니다. 아무리 선한 뜻이라 해도 어느 순간 나의 고집이고 욕심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좋은 종은 자신의 선한 뜻도, 이 길이 최선이라는 것도, 이것만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없습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다해서 무엇을 이루지만 나는 이루어 놓은 그것과 같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했다고 할 때, 내가 그런 자격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공이 아닌 것입니다. 감히 대가를 바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일을 해야 하기에 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뜻을 비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을 살면서 내 뜻이 막히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안다면 우리 길을 가로막는 것이 더 이상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은 다릅니다. 내리 누르고 세도를 부리는 것은 낮은 수입니다. 그것으로는 사람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높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6)

20190503(#남미 4일) Foz do Iguasu - Puerto Iguazu

● 20190503(#남미 4일) Foz do Iguasu - Puerto Iguazu : 나이아가라는 차도남, 이과수는 짐승남!

어제 밤 12시가 다 되어 이과수 공항에서 나오니 내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호텔 직원이 나와 있습니다. 그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요.ㅎ 그런 대접은 처음 받아 봅니다. 리오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이 늦어 포스 두 이과수의 숙소를 고심했습니다. 공항 근처의 호텔이 위치가 좋아 선택했는데 40불이어서 내 여행에 너무 호사인 것 같아 주저되어 센트로 쪽에 30불 정도로 호텔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밤늦은 시간이라 공항 셔틀 서비스를 부탁하니 10불을 더 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전 호텔은 무료 셔틀 서비스이구요. 그래서 한 선택인데 참 잘했습니다. 공항과 국립공원이 가까워 아침에 걸어서 폭포를 가고 걸어서 호텔로 돌아오니 교통비가 절감이 되고 짐도 호텔에 맡기고 가니 공원에서 락커 비용도 아낄 수 있었지요. 또 막상 아르헨티나 가는 길에 센트로를 가보니 그냥 시골 마을이 아닌 겁니다. 왔다 갔다 하루를 다 보낼뻔 했습니다.

내 여행 중에 가장 럭셔리한 숙소에 밤늦게 도착하고 이른 아침에 출발해야 해 충분히 누리지 못해 아쉽지만 서둘러 잘 차려진 아침진지를 하고 호텔에 짐을 맡기고 폭포를 향해 걷습니다. 아마존의 향이 가득한 정글 느낌이 해안가 도시 리오와는 또 다릅니다. 공원입구에 8시 반 정도에 도착했는데 표 사는 줄이 깁니다. 그런데 줄지 않구요. 나올 때는 줄이 없어 생각해 보니 공원 오픈이 9시라서 일찍 와서 오래 기다렸네요. 오늘 같은 날은 일찍 일어나는 새가 고생합니다.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아마존의 벌레들이 엄청 달려듭니다. 썬 크림은 준비했는데 벌레 약은 준비 못해 벌레 약을 뿌리는 사람들이 막 부러웠습니다. 한번 쓰자는 말은 못하구요.

이과수 폭포의 규모는 세계 최대라고 합니다. 3대 폭포 중 나이아가라와 빅토리아를 합친 것보다 크다니 나이아가라를 수백 번 다닌 나로서는 그 감동이 어떨까 궁금했지요. 일단 공원 규모와 분위기에 압도를 당합니다. 나이아가라는 도시 분위기인데 이과수는 정글 분위기지요. 사실 서로 비교하는 것이 우습지만 나이아가라가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이라면 이과수는 ‘짐승남(짐승 같은 남자)’이라고 할까요? 아마존 정글의 엄청난 물이 다 흘러내리고 있다고 보면 되지요. 안내를 잘 들었는지 모르지만 이과수는 폭포가 280여개라고 합니다. 그것도 아르헨티나 쪽에 분포되어 있구요. 사실 아르헨티나 쪽에서 보는 폭포가 더 웅장하다고 하는데 내일 가보면 알겠지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폭포의 규모와 아름다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걷는 도중에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답니다. 감사하게 날씨와 햇살도 딱이었구요. 폭포 아래로 가는 보트 투어는 악마의 목구멍이 있는 아르헨티나 쪽에서 하기로 하고 오늘은 트래킹으로 만족합니다. 브라질 쪽 폭포 투어는 3시간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다시 걸어서 호텔로 돌아와 오랜만에 빵빵한 와이파이 덕을 보며 영상을 올리고 짐을 찾아 아르헨티나로 가기 위해 포스 두 이과수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터미널이 나오지 않습니다. 느낌상 버스로 1시간은 간듯합니다. 브라질의 크기를 만만히 볼 수 없음을 절감했지요. 그리고 다시 아르헨티나 가는 버스 찾아 삼만리... 바로 옆에 있는 정류장을 못 찾고 배낭과 캐리어를 끌고 헤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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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기)
http://sanmul.net/technote/read.cgi?board=art_album&y_number=463&nnew=2

역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요구한 이야기를 들은 다른 제자들의 반응도 가관입니다. 분개하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이미 정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기도 전에 말이지요. 사실 그들도 똑같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낸 것입니다. 정말로 정의를 위하고 사랑을 위한다면 지금 내게 아무 것도 떨어진 것이 없어도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평화와 기쁨을 가로막을 것은 어느 무엇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 그 무엇에 분개하고 화낼 때 정말 나의 밑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지... 그런 이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입니다. 한 사람의 종이면 하나에 종속되겠지만, 모든 사람의 종이면 누구에게나 또 자유합니다. 종은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자기 할 일만 하면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이 다 선물인지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너와 나는 다르지 않고 하나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비판하겠습니까?(#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5)

대가

대가를 계산한 의는 이미 의가 아니라 자기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죄를 낳고 죽음을 가져옵니다.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조차도 길거리에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보게 기도하는 것은 이미 세상에서 그 상을 받았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하늘에서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받기를 원하고 하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대가와 상관없이 그저 하고 싶어 하니 좋고 행복할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대가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섭리와 뜻에 따라오는 것이지요. 바울은 자기를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종은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니,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가 해야 할 일, 주인이 지시한 것을 공손하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공은 주인에게로 돌리는 것이지요. 나는 예수의 제자이니 이 정도는 받아야지 하는 생각으로는 우상만 섬기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계산하고 따져서는 기쁘고 감사할 수 없습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4)

모르고 있다!

예수께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한 제자들의 목적은 역시나 흑심이었습니다. 남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높아지려는 것이었지요. 이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가 영광을 받을 때 자기도 덩달아 영광을 받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을, 종교 생활하는 것을 무슨 보험에 드는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예수 믿어요?” “천국 가려구요.” “예수 믿는데 천국에 못 간다면 어떻게 할래요?” “...” 할 말이 없어지지요. 결국 자기가 만든 천국에서 주인 노릇하려는 것이거나 두려움의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으니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에게도,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으려고 하니 주는 기쁨조차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내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나의 종교생활에, 나의 가정생활에, 나의 직장생활에. 또 내가 하는 공부에... 예수께서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있겠다는 것은 예수가 받는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를 받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의 결과나 대가에 대해서는 예수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를 따라 그가 간 길을 따라갈 수는 있습니다. 또 내게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 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요구하는 모습, 오늘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래서 받을 수 있는 상도 다 놓쳐버리는 것입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3)

모르고 있다!

예수께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한 제자들의 목적은 역시나 흑심이었습니다. 남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높아지려는 것이었지요. 이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가 영광을 받을 때 자기도 덩달아 영광을 받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을, 종교 생활하는 것을 무슨 보험에 드는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예수 믿어요?” “천국 가려구요.” “예수 믿는데 천국에 못 간다면 어떻게 할래요?” “...” 할 말이 없어지지요. 결국 자기가 만든 천국에서 주인 노릇하려는 것이거나 두려움의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으니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에게도,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으려고 하니 주는 기쁨조차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내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나의 종교생활에, 나의 가정생활에, 나의 직장생활에. 또 내가 하는 공부에... 예수께서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있겠다는 것은 예수가 받는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를 받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의 결과나 대가에 대해서는 예수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를 따라 그가 간 길을 따라갈 수는 있습니다. 또 내게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 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요구하는 모습, 오늘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래서 받을 수 있는 상도 다 놓쳐버리는 것입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3)

무엇을 해줄까?

다가와서 한다는 말이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달라는 제자들을 대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또 다른 감동입니다. 그들을 옳다 그르다 하지 않으시고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어주셨지요. 바라보는 속내와는 상관없이 맞아주시는 그 헤아림에서 모든 노여움과 서운함이 다 녹아집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고 그런 어른을 만나고 싶지요. 오늘 우리에게 다가와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을 당신은 무엇이든지 다 해주어야 해!”라고 누가 와서 그렇게 말하면 그들을 어떻게 대하나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지요? 남편이, 자식이 와서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말이 끝나기 전에 아마 손부터 올라갈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래 뭘 해 줄까?”라고 물어 주십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지요. 한 걸음 물러서서 스스로 살피고 반응하는 틈새가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도 무엇을 해주기 바라느냐고 묻고 계십니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2)

가까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합니다. 다가와야지요. 멀리 떨어져 있으면 착하지 못하고 실하지 못합니다. 착실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살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삶에 가까이 다가가 보아야겠습니다. 그동안 떨어져 있었다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 나의 진심과 영혼의 소리에로 가까이 다가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착해질 거예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그들이 하는 말은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지요. 선생님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확신이거나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님께 이렇게 친하게 가까이 나갔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또 교만하게 나대고 있지 않은지 하는 반성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헤아려 보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요한과 야고보가 어찌되었든지 고맙지요. 오늘 하나님께, 부모님께, 선생님께, 일에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깊은산에서오는편지 201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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