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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 가디언친구 12

리폼드 가디언은 개혁주의 기독교 매거진입니다. 개혁주의 신학과 목회, 신앙, 세계관, 교육 자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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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독서 모임

작년부터 시작하게 된 작은 기독교 독서모임입니다.
매월 첫째주 토요일 12시에 모이는데(월1회), 참여해보고 싶으신 분은 연락주세요.

각기 다른 다양한 기간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교리를 접해보지 못한 분들 위주의 모임으로, 많지 않은 양을 미리 읽어와서 해당 내용을 같이 정리해보고 있습니다.

제임스보이스 목사님의 '개혁주의서론'을 같이 읽었고, 현재는 존번연의 '천로역정'과 G.I.윌리엄슨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강해'를 진행중에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은 종교개혁이후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한 귀중한 교리서로 개신교(장로교)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쳐왔으나, 안타깝게도 현대교회에서는 그 자취를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예기치않게 시작한 모임이었는데, 처음 교리란 것을 접해보신 분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으셔서 부족하지만 여기에도 소개합니다.

(모임장소는 서울 송파구 문정동 제네바개혁교회이며,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뀔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23) 마귀의 시험 (1)

김재호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귀는 불붙은 창을 크리스천의 가슴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크리스천은 손에 방패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내어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귀는 우리의 영적 무장 상태를 유심히 잘 살펴본다. 그래서 무장이 영 부실한 이들을 공격해서 손쉽게 쓰러뜨리곤 한다. 그런데 마귀는 종종 충분히 무장하고 있는 이들도 공격해서 실족하게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목격하면 큰 혼란에 빠져 무기 자체가 낙후되었다고 여기며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동안 내가 상대하는 적이 어떤 존재였는지 몰랐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이다. 마귀는 우리 손에 들려 있는 무기가 낙후되기는커녕, 엄청나게 강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나 그는 누가 어떻게 그 무기를 다루느냐에 따라 성능이 천차만별로 나타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래서 마귀는 진리라는 무기를 다루는 일에 서툰 이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기를 역이용해 더 크게 낙심하고 넘어지게 만드는 일까지 일으킨다. 성경은 이런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네가 믿느냐? 잘하는 일이다. 악령들도 믿고 떤다(약 2:19).

그러자 마귀가 그분을 거룩한 성읍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분께 말하기를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래로 뛰어내려라. 기록되어 있기를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자기의 천사들에게 명령하실 것이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하니(마 4:5, 6),

그런데 떠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악한 영에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말하기를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령한다.”라고 하였다.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도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 악한 영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하고, 악한 영에 들린 그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 올라 그들을 제압하여 이기므로, 그들이 상처를 입고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다(행 19:13~16).」

소요리문답 강해 (23)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신약 성경 빌립보서 2장 9~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28문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설교하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셨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한 설교는 많이 듣게 되는 편이고, 성탄절이나 사순절 기간이 다가오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대한 설교는 참으로 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교인이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높아지심도 그분의 낮아지심 못지않게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높아지셨습니까? 첫째, 부활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다른 위대한 종교 지도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했으니,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는 생명의 구주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 믿음도 헛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고전 15:17)?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신학도, 신앙도, 훌륭한 예배당도, 아름다운 찬양도 다 무가치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허망해지고 힘없이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승천(昇天)으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보통, 승천 교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예수님의 승천 교리를 비웃고 조롱하면서 정통 기독교 신앙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어떻게 사람이 구름을 탈 수 있나? 그걸 믿는 네가 한번 구름을 타 봐라.」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승천이 허구라는 온갖 학설을 제시하는데, 그 정도가 부활 교리를 부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이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 그분의 부활도 역시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는데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대체 어디로 가셨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을 믿는 성도들이 장차 어디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될 지에 대한 의문도 일어날 것입니다...

에릭 리델 전기, 『영광을 위하여(For the Glory)』

– 선한 경주를 훌륭하게 마친 하나님의 사람을 기리는 심심한 헌사 –

이지현

개봉한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 1982)」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참가한 영국 남자 육상 대표팀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볼 때,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주일 성수를 위해 주 종목인 100m 경기를 포기하고 400m 경기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딴 에릭 리델을 눈여겨볼 것이다.

이 영화는 끝 무렵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문구로, 리델이 올림픽 이후에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를 알려준다.

「에릭 리델, 제2차 세계대전 말에 피점령국 중국에서 선교사로 죽다. 온 스코틀랜드가 애도하다.」

영화만 보면, 그냥 ‘리델이라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청년 한 명이 있었구나.’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또는, 주변의 비난과 압박에 굴하지 않고 주일 성수를 잘해서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리델의 신앙과 용기에 감탄하며 그를 칭찬하지만, 전반적인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왜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는지, 그곳에서 어떤 사역을 하다가 순교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그가 모든 성도들에게서 존경받는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지어 그는 선교지였던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도 존경을 받는다. 오래전에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그의 선교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계속 세워져 있다.

도대체 에릭 리델은 어떤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이렇게 존경받는 것일까? 놀랍게도, 이 질문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스포츠 기자가 구체적으로 답을 해준다. 던컨 해밀턴은 『영광을 위하여』라는 전기(傳記)를 통해 에릭 리델의 생애를 생생하고 유려하게 그려낸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약 3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인물을 취재했다고 한다...

「예배 진단1」 예배란 무엇인가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모든 신앙의 행실이 귀하고 소중하지만, 예배는 그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성도들이 자기의 신앙 정체성을 나타내는 통로이자 표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예배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사랑하며, 계명을 귀하게 여기고 기쁨으로 준행하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백성임을 나타낸다.

이처럼, 성도는 무엇보다도 예배자로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일평생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그들을 불러내어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존재로 세우신다. 또한, 그분의 소유가 된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인도하심을 맛볼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이자 방편이 된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 함께 하리라고 기대하는 이들은, 수도꼭지를 잠그면서 물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이렇게 예배는 중요하지만, 현대 교회의 예배는 너무도 심각하게 타락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의 표지가 아닌, 자기 내면의 종교적 정서를 만족시키고 육체적인 오락을 즐기며, 정신적인 위로를 얻기 위한 인간 지향적 의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교회는 출석 교인 확보에만 급급해하며 그런 타락한 예배를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교인들도 그런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

그러한 죄악 속에서 설교와 찬송은 너무나도 저급해졌고, 마귀는 그 일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타락한 설교를 듣고 타락한 찬송을 부르면서 자기를 예배하고 섬긴다. 거룩한 교회에서 음녀와 함께 뒹굴며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하는 죄를 지으면서도,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눈뜬장님으로 가득해지고 만 것이다.

#이슈진단 #예배 #성도의표지 #기쁨 #감사 #예배의타락 #오인용목사 #리폼드가디언

「예배 진단2」 현대 교회의 잘못된 예배와 그 해악들

김재호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가 섬기는 대상을 닮아간다. 우상을 섬기면, 그 우상처럼 어리석고 미련해진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황소처럼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다(신 9:13). 반대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면, 그 사람은 점점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지혜로워진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같은 인물이 거룩해지고 지혜로워지는 모습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으로 올바르게 섬기는가 하는 문제는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와 연결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잘못된 예배는 한 영혼을 완전한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빛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를 섬기다가 거짓되고 더러운 마귀의 모습을 판박이처럼 닮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예배가 무엇인지 잘 알아두어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예배가 드려지는 자리에서 속히 돌아서서 생명을 보전해야 한다.

1. 잘못된 예배란 무엇인가

올바른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끝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모인 그분의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시며, 그들은 참된 감사와 기쁨으로 그것들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며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만 맞추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이나 외적인 환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구약 성경을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단에서 피운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사용하여 분향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나온다(민 3:4). 또한, 신약 성경에는 주님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지 않아서 많은 교인들이 질병에 걸리고 목숨을 잃은 사건도 나온다(고전 11:18~34).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은혜로우심이 온전히 드러나는 예배만 기뻐 받으시고, 그렇지 않은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그분의 영광스러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과 나란히 서서 함께 영광 받기를 거부하신다. 이방 신들은 신자들이 ‘물량 공세’로 나오면 어떤 것도 다 용납하고 받아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정해주신 대로 드리는 예배만 열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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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진단3」 성도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박지훈

예배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한 분(행 17:24; 롬 16:27)께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분을 예배하라는 거룩한 계명을 주셨다(출 25 이하; 요 4:23). 예배에서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영광을 받으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면서 그분과 교제하는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피조물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과 기쁨이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자기가 참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히 10:19). 그 길밖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십자가에서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유일한 근거가 되신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보하심 가운데,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후 13:13).

또한, 예배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에 따라 드려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하고 악한 인간이 자기 주관과 생각대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진노하신다(출 12:15; 레 10:1-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 곧 말씀에 따라 드리는 예배만 온전한 의미가 있고, 다른 예배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부를 뿐이다.

이와 같이,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과 드리는 근거와 방식에 있어 일상적인 것과는 매우 다른 특별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배는 모든 인간적인 조건이나 요소를 뛰어넘는, 매우 거룩하고 외경스러운 것이다. 이토록 중대한 일에 참여하면서 그에 걸맞은 자세를 갖추지 않는 것은 아주 큰 불경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예배의 자세’는 참으로 심혈을 기울여 살펴봐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이슈진단 #예배 #예배자세 #말씀 #대표기도 #찬송 #축도 #리폼드가디언

소요리문답 강해 (2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27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란 무엇입니까? 하늘 영광을 가지신 성자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일은 그분 자신을 말로 다 할 수 없이 무한히 낮추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왕이 자기 권력을 모두 다 내려놓고 평민이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왕으로서 누리던 모든 권세와 영화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누구도 그 왕을 우러러보거나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그 왕이 정말로 낮아졌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셨으니, 자기를 얼마나 낮추신 것이겠습니까?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닭이나 돼지의 형상을 입는다면 어떻겠습니까? 닭처럼 울면서 퍼덕거리고, 꿀꿀거리며 게걸스럽게 먹는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한숨이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일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일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성탄절 문화만큼 좋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절기 문제도 있지만, 대부분 동네 친구 생일 축하하듯 하는 행태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 전쟁과 하나님의 주권』

이지현

작년부터 한반도 정세가 불안정해지고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내심 ‘이러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불안해하고 있다. 그 전에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예측이 꾸준히 제시되었지만, 1993년 이후 이렇게까지 상황이 심각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작년 4월과 8월 무렵에는 미국이 대북 군사작전을 감행하리라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나가서 많은 사람들이 비상물품, 금, 달러를 사고 비행기 표를 준비하는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발 빠르게 대처하기도 했다.

현재는 평창 동계 올림픽 때문에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사태의 본질이 바뀐 게 없어서 많은 외신이 올림픽이 끝난 뒤에 급변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한반도는 갈수록 예측하기 어려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질문하면, 아마 대부분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드려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물론, 이런 기도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개 여기까지는 잘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수많은 한국교회 신자들은 큰 영적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가지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과연 옳은 것일까?

「복음 진단3」 현대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승훈

「우리 싸움의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이다. 우리는 헛된 사상들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모두 파괴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한다(고후 10:4, 5).」

이 글은 새로운 복음 전도 전략을 말하려는 글이 아니다. 전략과 방법에 대한 글은 이미 수없이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방법이 계속 실패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왜 이러한 실패가 계속되는 것일까? 전략의 부재 때문일까?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축소되었기 때문일까? 전 세계 교회를 하나로 묶는 통합 조직이 없어서일까? 세상이 너무도 악해서일까?

그러나 전략이나 방법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만약, 그런 것들이 복음 전도 문제의 본질과 핵심이었다면, 성경은 아무런 전략도 없이 ‘와서 들어보라’는 식으로 전도를 책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사람을 전혀 책망하지 않는다(요 1:46). 영향력, 조직, 세상의 악함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들은 복음 전도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현대 교회가 복음 전도에 계속 실패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채, 자꾸 이런저런 방법에만 의존하니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이다. 복음 전도가 잘 되지 않는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에 있다...

「복음 진단1」 복음이란 무엇인가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성경 66권 중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사복음서(四福音書)라고 불린다. 그런데 왜 유독 이 네 권의 책만 복음서라고 불릴까? 왜냐하면, 이 책이 모두 예수님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어 쓰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복음이란 예수님과 그분의 생애를 뜻한다.

그렇다면 사복음서를 제외한 나머지 성경은 복음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사실, 성경은 모두 다 복음이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서나 한결같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알면, 성경의 본래 의미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말씀이시다(요 1:1).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의 핵심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항상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 부분에서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대부분 복음을 알지 못하거나, 도중에 잃어버렸거나,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설교와 가르침 속에는 예수님이 없고(이는 복음이 없는 것이다), 그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헌신하라는 일반적인 권면과 교훈으로 가득하다. 이런 설교와 가르침은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지 못하며, 표면적인 종교 생활을 하게 할 뿐이다...

필립 켈러의 『 양과 목자(A Shepherd Looks At Psalm 23) 』

필립 켈러의 『 양과 목자(A Shepherd Looks At Psalm 23) 』
– 한 목자가 체험한 시편 23편의 감격스러운 진리

이지현

그리스도인이 즐겨 암송하는 성경 구절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시편 23편일 것이다. 그만큼 널리 사랑받는 이 시편은 6절로 이루어져 있어 외우기도 쉬운데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 왕은 어린 시절에 목동으로 일하며 아버지의 양 떼를 쳤다. 그는 이 시편에서 자신을 양으로,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편 – 개역한글판).」

이 시편은 워낙 간결한 데다 표현이 복잡하지 않아서 누구나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너무나도 쉽고 친숙한 시편이다 보니, 오히려 이 말씀이 지니고 있는 깊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일이 많다. 이 시편 23편에는 값진 신앙의 보물(寶物)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묻혀 있다. 하지만 이 보물은 ‘양’과 ‘목자’가 어떠한 사이인지를 충분히 알지 못하면 캐낼 수 없다...

「대한민국 진단1」 한국 교회 신자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한국 사회에는 종교인은 대부분 애국심이 부족하고 국가관이 튼튼하지 못해 나랏일에 무관심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종교인들만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태도를 종교인의 본분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이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도 다양한 종교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많은 기독교인이 그런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서 국가와 민족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나서지 않는 일을 경건함의 표지처럼 생각하고 있다. 즉, 교회 일에만 몰두해야 경건한 신자이고, 그 밖의 일에 나서면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조차 국가와 민족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매우 희박하다.

그나마 198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공교육을 받았기에, 한국 교회 신자들이 기본적인 국가관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좌익 세력이 진보의 이름을 내걸고 사회, 문화, 정치 등의 각 분야에 진출해 주도권을 쥐면서, 신자들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둘씩 좌익 사상에 몸을 담그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진단2」 주사파(主思派)는 어떻게 생겨났고 그 영향력은 어떠한가

김재호

‘주사파’는 8, 90년대 대학가에서 북한의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主體思想)1을 따르던 이들을 말한다. 하지만 본인이 대학교에 다닌 2000년대 초반에는 ‘한 주에 학교를 네 번 나오는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 때 활발하게 활동한 주사파는 ‘주사파(主思派)’가 아니라 ‘주사파(週四派)’였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8, 90년대를 주름잡았던 학생 운동의 여파가 아직 대학 문화 속에 남아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한총련 주도로 반미(反美)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집회에 호응하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눈 뜨고 보기 민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외치는 반미자주(反美自主) 선전, 선동 구호는 너무도 이질적이었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8, 90년대에는 농촌 활동, 소위 ‘농활’이 참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대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소외된 농촌을 돕고 살리자면서 방학 때마다 시골로 내려가곤 했다. 하지만, 농활은 순수한 농촌 봉사 활동이 아니었다. 농촌 사회를 의식화해서 사회주의 세력의 기반으로 삼으려고 한 정치 활동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대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참여하는 학생이 없어서 일정을 취소하는 일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랬던 만큼, 우리 시대 대학생들은 대부분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 나온 온라인 게임을 하며 놀기 바빠서 정치 문제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냥 한나라당은 구태의연한 수구꼴통당이라는 정서에 편승하여 함께 욕하며 낄낄거리는 이들이 절대다수였다...

「대한민국 진단3」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자유 대한민국을 보전해야 하는가

「대한민국 진단3」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자유 대한민국을 보전해야 하는가

김재호

현재,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어디에서든지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며 성경 말씀을 가르쳐도, 나라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겠지만,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이런 상황이 예외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읽어봐도, 한 나라가 신앙의 자유를 전폭적으로 보장하는 일이 결코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자유와 권리’라는 개념은 태초부터 존재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유롭기를 바라고 자기 권리를 지키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권리’라는 개념은 사람의 창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는, 그 누구도 완전한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각종 속박과 압제가 인간 사회를 뒤덮었으며, 개인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심각하게 축소되고 무시되었다.

그 결과, 고대 사회에서는 자유와 권리를 대부분 계급적 신분 질서를 통해 제한적으로 보장했다.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첩(妾)보다는 정실부인에게, 아동보다는 어른에게, 노예보다는 자유민에게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보장했다. 고대 사회에서 드물게 보편적인 자유와 권리를 인정한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밀라노 칙령이 있다. 로마 제국은 313년에 이르러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모두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전까지는 기독교를 믿는 일은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협하는 불법 행위였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8)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아이제나흐)

설형철

이번에는 루터가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도중 ‘납치’(?)당해 머무른 바르트부르크 성이 있는 ‘아이제나흐(Eisenach)’로 떠나보겠습니다. 아이제나흐는 작지만 유명한 도시인데,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가 태어난 곳이자 루터가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그렇습니다.

이번 탐방에서는 먼저 바흐와 루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게오르크 교회를 둘러보고, 루터 하우스와 바흐 하우스를 거쳐 바르트부르크 성을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제나흐 역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고 있을 때, 저만치 우뚝 솟아 있는 게오르크 교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루터는 학창 시절에 이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신앙 생활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여느 학생처럼 짓궃은 장난도 많이 치고, 예배 시간에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시절에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영혼에 더 유익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만큼 로마 카톨릭의 교리,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또한, 루터는 이곳에서 설교도 했습니다. 1521년, 제국 의회 참석차 보름스로 가던 루터는 잠시 이곳에 들러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자기에게도 필요했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면서 영적인 힘과 용기를 얻는 루터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예배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바흐의 동상이 곧장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는 이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평생 철저한 루터교 신자로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바흐의 동상에서는 루터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의 담대함과 기개가 흘러나오는 듯했습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20) 시험과 경성(警醒)

김재호


「그러나 크리스천이 멈추어 선 곳에서 다시 되돌아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된 문지기가 – 그의 이름은 경계(警戒, Watchful)이었다 – 크리스천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그렇게도 용기가 없으십니까? (막 4:40) 사자들은 사슬에 매여 있으니, 무서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자들의 신앙을 시험해보고 믿지 않는 자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사자들을 거기에 매어둔 것입니다. 길의 한 가운데로 오시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안전하게 지나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항상 신앙에 따라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안타깝지만, 때로는 현실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시험에 들어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주춤거리곤 한다. 그러다가 모든 게 끝났다는 깊은 낙심과 절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때, 신자의 마음속은 모든 것을 접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지금껏 힘써온 일들이 모두 의미가 없으며 인생을 완전히 낭비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성경은 성도가 거센 시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천로역정 #존번연 #시험 #경성 #책망 #사탕발림 #삯꾼 #리폼드가디언

소요리문답 강해 (20)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다 함께, 히브리서 9장 23절에서 28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아멘.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25문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한 희생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26절 중반쯤을 보면, 이 제사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이 ‘단번에’라는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28절에도 나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26절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셨겠습니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고도 유다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토마스 왓슨의 『 회개(Repentance) 』
– 영혼을 사랑했던 청교도 목회자의 간절하면서도 엄숙한 권면

이지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회개(repentance)’라는 단어를 종종 듣게 되지만, 이보다 더 막연하게 느껴지는 단어도 없다. 대개 후회하고 자책하거나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한 번 드리는 것 정도를 회개라고 여기고, 그 중요성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같은 교회를 다녀도 회개에 대한 생각이 각양각색이다. 믿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는 ‘예수님께 죄를 회개하며 그분을 구주로 영접했는데, 왜 또 회개해야 하지?’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한편, 어떤 신자는 회개를 공로처럼 여기면서 잘못된 열심을 내기도 한다. 또 다른 신자는 회개하라는 권고를 율법주의처럼 받아들이며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회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못지않게 매우 중요하다. 회개가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신앙은 모든 면에서 크게 해를 입는다. 심할 경우, 거짓 신자였음이 드러나며 천국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성경 곳곳에는 거짓 회개를 경고하며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사 58:5~6; 욜 2:13 등).

회개를 올바르게 하려면,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믿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듯(롬 10:17), 참된 회개도 올바른 지식으로부터 나온다. 회개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쌓으려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배우면서 회개에 관해 잘 설명해놓은 좋은 신앙 서적을 읽어야 한다.

여러 좋은 신앙 도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토마스 왓슨 목사님의 『회개』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간결하지만, 깊이 있게 회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훌륭한 안내서이다...

「성령 진단1」 성령님께서는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하시는가

박지훈

오늘날 한국 교회 신자가 가장 잘못 이해하는 성경의 진리는 무엇일까? 분명히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진리일 것이다. 한국 교회는 성령님께서 실제로 하시는 일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만 주목하는 은사주의, 열광주의, 영성주의로 거의 기울어져 있다.

한편, 앞서 말한 이들을 지나치게 경계하다가 성령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 오류에 빠져 있기도 하다. 그 결과, 성령님에 대해 올바르고 풍성하게 가르치는 일은 매우 희귀해졌으며, 성령님을 올바르게 알고 믿는 신자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성령님께서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保惠師)로서, 성도의 마음에 항상 거하시며 성도와 가장 가까이 계신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재(不在)는, 한국 교회가 영적인 혼란과 어둠에 빠져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한국 교회는 무수한 오류에 빠져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끊임없이 짓고 있다. 비록 상황은 좋지 않지만, 우리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간절히 사모하며 가까이 모시는 참 신앙을 지켜가야 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오늘날의 어두운 영적 상황 속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경건의 지식, 곧 성령님의 존재, 그분의 일반 사역, 그리고 구원 사역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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