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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교회친구 24

천대신앙 땅끝신앙을 꿈꾸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목민교회] 담임목사 이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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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6일 성품묵상-신령한 노래

2019년 8월 16일 성품묵상-신령한 노래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제 겨험으로 보면 찬송은 입술의 찬송과 마음의 찬송이 있는 것같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입술만 움직이는 모습이 있고 마음을 다해서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예수님 안에서 재창조하신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을 부르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삽니다.

우리의 입술에 찬송이 마른 사막과 같이 고갈되었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입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heart)은 믿음의 핵심이 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되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아시스에서 분출되는 샘처럼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찬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입술의 고백으로 그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찬양은 하나님의 성호를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찬양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만이 토해 낼 수 있습니다.

찬양은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찬양이 우리의 성대를 울리고 입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찬미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찬양이라면 진정한 “립 서비스” (a true lip service)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없이 드린다면 그저 입술만 움직이는 립 서비스입니다. 찬송, 찬양, 시, 노래 등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핵심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드리는 찬양은 모든 악기가 동원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우리의 몸으로 춤을 추는 것이 포함됩니다.

목소리와 악기와 춤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은 곧 성령 충만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음악적으로 잘 하느냐 못 하느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찬양하는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psalm)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고, ‘찬미’(hymns)는 시편 이외의 찬송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감동 아래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구약 성경 안에는 많은 찬양들이 있었습니다. 또 신약 교회에서도 많은 종류들의 신령한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이러한 시편들과 찬미들과 신령한 노래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들로 “서로 화답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한 사람이 부르면, 다른 사람이 부르거나, 한 그룹이 부르면 다른 그룹이 부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서로 찬양하면서 서로의 찬양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눈을 마주치면서 찬송으로 서로 신앙을 고백하고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하는 일이야말고 서로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우리는 시와 찬송과 성가로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찬양은 마음에서 흘러나오고 입술을 통해서 고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합니다.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전쟁의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됩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에 유익한 음악으로 서로 화답하며 열려 있는 슨간과 공간을 거룩한 음악으로 채우게 하소서.

2019년 8월 13일 성품묵상-입은 마음의 문이다

2019년 8월 13일 성품묵상-입은 마음의 문이다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속담에 “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화는 입에서 나간다”고 합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다툼이 생겨나는 것은 부적절한 언어 때문인 경우가 실로 으뜸입니다. 한순간 신중하지 않게 내뱉은 말은 후회해도 소용없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소혜(小惠)의 남편은 말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때로는 유머러스하지만 때로는 썰렁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친구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연인이나 부부는 서로 눈을 바라보는데, 나는 오히려 눈을 피한단 말이야!”

소혜는 이 말을 듣고 화를 참지 못하여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입은 마음의 문입니다. 입 안은 곧 마음의 문이어서 엄히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마음 속의 참된 것이 다 빠져나갑니다.

눈은 마음의 창입니다. 눈은 단순히 사물을 보는 기능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눈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눈을 보면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사나운 사람은 눈빛도 사납고, 마음이 불안한 사람은 눈빛도 불안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눈빛도 맑지 못합니다.  

의지는 곧 마음의 발이어서 엄히 의지를 지키지 않으면 사악한 길로 질주합니다.

입은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마음이 입을 통해 나가는 것은 마치 사람이 문을 통해 집 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아서 입을 마음의 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의지는 마음을 움직이는 발입니다.본디 마음의 본바탕은 사람마다 같지만 의식의 작용에 따라 선악의 차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의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사람이 발을 움직여 이동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의지는 마음의 발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의지를 엄히 다스리지 않으면 마침내 사악한 길로 달리게 되어 죄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고, 입은 마음의 문입니다. 의지는 마음의 발입입니다. 마음은 행동을 결정합니다. 어떤 마음을 품으면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시편 141:3-4

말(言語)에 실수가 전혀 없는 자가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아무리 입에 재갈을 먹인다 할지라도 말에 실수가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입술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혀조차 길들일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소망할 때 비로소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무례한 표현을 삼가하게 하소서. 아멘

2019년 8월 12일 성품묵상-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

2019년 8월 12일 성품묵상-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있는 존재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흠이 없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흠이 없게 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어진 존재들이니까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흠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망치는 못질을 하는데 흠이 없어야 합니다. 모양이 이렇게 생겼든지 저렇게 생겼든지 못질을 해도 자기 자신이 으그러지지 않아야 다음에도 못질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양이 좋다 해서 반드시 좋은 망치인 것은 아닙니다. 요즘 길거리에서 파는 망치를 보면 모양이 좋은 망치가 많습니다. 그러나 몇번 쓰면 으그러져서 못쓰게 됩니다.

바울은 성도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데서 시작되어집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바울의 교훈은 진정한 사랑의 삶이 자신의 영적인 자존심을 지키는 일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판단 내려 주신 자신의 몸을 음행을 통하여 더럽히는 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자신을 구속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또한 성도는 언어 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나타내야 하는데 항상 감사하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성도의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으므로, 그의 삶은 항상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엡 5:1-4).

물은 물길이 있어야 가고, 생명은 생명의 길이 있어야 가듯 성도는 성도가 가야 힐 길이 있습니다.

피는 혈관이 있어야 흐르게 됩니다. 뇌출혈은 혈관이 터져서 생기는 증상입니다.

피는 우리 몸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혈관이 터지면 사람이 죽게 됩니다.

한방에서 기는 경락(맥)을 통해서 흐른다고 합니다. 침을 맞는 것은 기가 흘러가는 것을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가 가야할 길,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벗어나면 영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언어생활에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우리는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아갑니다. 표현하지 않는 삶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나타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으로 나타낸다는 것일까요?

모든 나타남의 가장 기초적인 차원은 곧 우리 몸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표정을 통해서 눈빛을 통해서 손짓을 통해서 입술을 통해서 걸음걸이를 통해서 드러냅니다.

표현된다는 것은 결국 신체를 경과해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막말이나 분노할 때 언어. 행동과 같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무례한 표현을 삼가하게 하소서 아멘

2019년 8월 9일 성품묵상-복종(submit)

2019년 8월 9일 성품묵상-복종(submit)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가정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가정이란 "사랑의 학교"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가정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희생입니다. 자기희생의 근본은 그리스도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그 어디에도 희생이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자녀들은 부모가 부부간에 나누는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부부간에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 서로의 잠재력을 북돋우고 격려하는 일,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가면서 사랑해 주게 되면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사랑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사랑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믿는 것이며, 그 사람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의 능력을 개발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며,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속사람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열렬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피차 복종"의 뿌리에는 주님, 즉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또는 권세 있는 자들의 힘이 두려워서 서로 복종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시는 그리스도를 두려워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복종합니다.”

참된 의미의 복종(Submit)은 서로에게 종속시키고 그 가치에 맞는 것으로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복종"은 상대방이 매우 높은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만큼의 가치를 가졌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눈으로 서로를 볼 때, 서로 가장 귀한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기꺼이 복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obey)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마'(Shema)라고 합니다. 쉐마는 '분별하다', '듣다', ' 복종하다', '동의하다'란 뜻입니다.

쉐마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여 그대로 복종(submit)하는 것으로 이성뿐 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동의하는 전인격적인 복종을 뜻합니다.

경외(awe)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야레’라는 말로, 이것은 공경의 대상을 통해 갖게 되는 두려움 즉, ‘참된 두려움’ 또는 ‘놀라워하다’ 등을 뜻합니다.

따라서 ‘경외’는 깊은 존경(respect)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공경(honor)하며 존중히 여기는 태도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다스리심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순종의 결과는 보호와 평안, 안식과 번영으로 나타납니다.

피차복종이 왜 어려운를 생각해 봅니다. 서로 사이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상대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행동의 토대에 그리스도 있을 때 피차복종이 가능합니다. 주님과의 수직관계가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상호관계 즉 수평관계입니다.

피차복종은 상호협력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우리의 시산이 그리스도를 바라볼때 비로소 피차복종이 가능해 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면 서로 복종할 수 있습니다.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상대의 기호를 배려하여 피차복종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2019년 8월 8일 성품묵상-인생은 건축이다.

2019년 8월 8일 성품묵상-인생은 건축이다.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인생 건축이라면 나는 인생이라는 멋진 집을 건축하는 건축입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만든 건축입니다.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건물의 설계와 도시의 설계는 인간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건축은 꿈에 속합니다. 인생은 꿈입니다. 예술은 이처럼 꿈속의 환상입니다. 환상이야말로 우리들의 진리입니다.

위대한 건축은, 측정할 수 없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설계과정에서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을 통하여 진행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측정할 수 없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당신은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 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러나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이어야 하는 것이고 인간을 위한 건축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롯이라는 건축가를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의 건축은 장엄하고 웅장하며 천년을 지나왔지만 21세기에도 경탄하만한 예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롯의 작품은 반면작품으로 천년을 이어 내려 오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인생건축물의 자기만의 설계도가 있었지만 롯은 그렇치 못했습니다. 그는 늘 주변을 살피는 삶을 살았습니다.

두 천사는 롯에게, 이제 곧 재앙이 닥칠 터이니 모든 가족을 모으라고 일러 줍니다.

롯은 두 딸과 약혼한 사위들을 찾아가 그 사실을 알립니다만, 그들은 롯의 말을 곧이듣지 않습니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 두 천사는 롯에게 서두르라고 이릅니다만, 롯은 결단하지 못하고 미적거립니다.

결국 두 사람은 롯과 그 식구들의 손을 잡아 끌어내어 소돔 성 바깥 안전한 곳에 피신시킵니다.

천사들은 롯의 호소를 듣고 그의 뜻대로 해주었습니다. 안전한 곳에 이르자 두 사람은 롯과 가족에게 “뒤를 돌아 보지 말고”(17절) 멀리 있는 산으로 피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롯이 가까운 동네로 피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두 사람은 롯의 간청을 받아들여 근처에 있던 작은 성으로 피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소알이라는 성에 안전하게 피신한 후에 소돔과 고모라에는 엄청난 재앙이 내립니다(창 19:15-23) 

영향력은 건축물입니다. 천대에 이르는 장구한 건축물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바닷물을 담을 수 있는 건축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거룩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살아온 모든 순간들은 가족들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되어 그 전통이 전승되는 법입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은 가족을 넘어 자신이 사는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롯은 그 점에서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고는 할 지언정 그에게서는 믿음의 영향력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위기가 닥쳤을 때 바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면을 가지고 사는가?

하나님께서 자연을 만드신 건축가라면 나는 그 하나님을 닮았는가?

나는 외관을 스케치 하는 건축가인가? 아니면 방주를 지은 노아처럼 공간을 창조하는 건축가인가?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내가 설계하는 건물의 공간과 도시의 공간은 인간을 수용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이웃을 위한 건축가가 되게 하소서. 아멘

2019년 8월 7일 성품묵상-의심의 숲

2019년 8월 7일 성품묵상-의심의 숲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의심’을 종종 ‘믿음’의 반대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의심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반대로 믿음은 좋은 것이라는 간편한 도식을 만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의심의 뿌리에서 믿음이 자라납니다.

요한복음에 도마는 세번 등장합니다 .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24~29절은 도마가 세 번째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였을 때 그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여드레가 지난 후에 주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홀연히 나타나시어 도마에게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라시면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를 직접 만난 도마는 그 위엄 앞에 압도되어 예수의 몸을 만져 보지도 못하고 예수를 "자신의 주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 고백을 토해냅니다.

도마는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의 조상이 됩니다. 의심과 회의가 날은 옥동자입니다.

예수님은 ‘의심은 과연 불경한 것인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행동을 통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잘 압니다.

회의를 모르는 신앙은 폭력과 손을 잡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 다름을 용납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든 문화든 이데올로기든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근본주의는 다 폭력적입니다.

그들은 인식론적 상황의 다양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한편 자기들의 교설이나 생각을 보편적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유한합니다. 누구도 진리를 전유할 수 없습니다.

의심은 더 깊은 인식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데카르트는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보지 고는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태도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의심의 숲을 통과하지 않는 한 뭔가를 깊이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삶은 모호합니다. 빛과 어둠, 성과 속, 선과 악이 뒤엉켜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삶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제 옳은 것이 오늘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새롭게 물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도마의 손을 이끄는 주님의 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더 깊은 인식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해 기꺼이 당신의 상처를 내보이십니다.

그것은 비난이나 꾸중이 아니라 회의를 통과해야 신앙에 이를 수 있음을 긍정하는 표지입니다.

회의는 불경 혹은 불신앙의 징표가 아니라 은총의 통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증거를 원하는 도마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회의에 빠진 도마에게 평안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존중이 있었습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상대의 기호를 배려하게 하소서.

2019년 8월 6일 성품묵상-자유제한

2019년 8월 6일 성품묵상-자유제한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자유'하면 존 스튜어트 밀이 제일 먼저 떠 오릅니다. 밀이 생각한 자유의 핵심에는 개인(individual)이 자리합니다.

자유란 한 마디로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의 영역은 아주 넓습니다.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와 같은 내면적 의식의 영역은 물론,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와 결사의 자유까지 포괄합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자유가 무한히 확대될 때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의 확대되는 자유와 충돌합니다.

나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간명한 원리에 의한 제한이 따릅니다. 

제임스 밀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밀은 존중돼야 할 개별성과 사회성(sociality)의 조화의 필요성을 잊지 않습니다. 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질서 간의 조화가 요구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 못지않게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발견한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개별적인 자유를 철저하게 제한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유자임을 말합니다. 그는 자유인으로 태어났고 로마 시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게 하려고 스스로 종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원리를 적용시켰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20절).

그는 어떤 경우에는 율법을 따르면서 유대인들을 설득시켜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율법 없는 자와 같이(21절). 즉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행하였습니다.

죄가 되지 않는 한 그 이방인 중에서는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지 않는 자처럼 행했습니다. 그는 특권이나 형식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2절). 그는 약한 자들을 무시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함으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리는 포기하지 않았으나 남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는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고전 9:19~23)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 보면 더 많은 개인적인 자유를 확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 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와 공동 선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삶이야말로 아름답고 엔돌핀이 돕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기쁨으로 자신의 지유를 제한해서라도 하나님 나라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싦을 살게 하소서. 아멘

190804 예배스케치 & 2배부흥 미션(1)

우리 주변의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작정카드 작성시간을 가졌습니다.

미션1. 하나님께 먼저 기도로 우리가 품은 영혼들을 올려드려요. 작정하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고 우리의 힘이나 욕심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영혼구원에 대해 미리 안된다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는 마음은 없는지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는 한 주를 보냅시다!

2019년 8월 5일 성품묵상-참다운 삶

2019년 8월 5일 성품묵상-참다운 삶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참다운 싦이란 공동선을 이루는 삶입니다.
 
참다운 삶은 욕구를 충촉시키는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어야 합니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삶은 빈 껍질일 뿐입니다. 

참다운 삶은 말을 먼저 앞세우지 않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안으로 생각하는 기능이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 신뢰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의 내면이 허술하기 때문이고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삶은 통찰력 있는 삶입니다.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해 어떤 것이 참으로 얻는 것이고 잃는 것인지 내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잃지 않고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침다운 삶은 고독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나그네 길에서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거든 차라리 혼자서 갈 것을 선택하십시요 궁색하게 어리석은 자와 길벗이 되지마십시요.
 
참다운 삶은 행위로 판단받습니다. 날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때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그 행위로 말미암아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람도 되는 것닙니다. 

요셉은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요셉은 인생 전체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소유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이었습니다.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들어왔습니다. 시위대장은 요셉에게 이들을 섭기도록 시켰습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와 있는 요셉의 생애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와 관심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신분이 높은 상류층 인사들만 갇히는 옥에 요셉이 갇힌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창 40:1-8)

요셉은 낙심하는 동료 죄수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그에 맞는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기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남의 영역을 침해 하면서 욕심을 부린다면 자신도 해치고 이웃에게도 피해를 입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전문 지식을 익히고 그 길에 한 평생 종사하면서 헌신 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단련의 시간과 기쁨의 시간만 있을 뿐입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2019년 8월 2일 성품묵상-자유제한

2019년 월 1일 성품묵상-자유제한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자동차 "두 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환자를 이송하는 앰뷸런스였고, 또 다른 하나는 최신 모델의 승용차가 계속해서 차선을 바꾸고, 추월하고, 중앙선까지 침범하며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도로! 똑같은 시간! 똑같이 과속하는 이 두 차량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핵심은 "차량 가격과 외형의 차이가 아니라, 누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가?"에 있습니다. 

자아와  욕망이 내 삶을 운전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내 싦을 운전하느냐 그 차이 일뿐입니다.

결국 "누가 내 인생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가? 이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잘 하고, 승리하고, 인정받기" 원합니다. 

"승리는 누가 내 삶을 주도하는가? 누가 내 인생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가? 누구를 믿고 살아가는가?"로 결정됩니다. 

사울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다윗의 부하 장군들은 사울을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지금 사울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 다윗과 그 부하들이 사울의 칼에 죽음을 당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이 세운 통치자라 하여, 죽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윗은 부하 장군들에게 사울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심판과 복수의 권한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기에 인간이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또한 인정하였습니다. 삼상 26:7-12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에 자신의 산택을 자제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공경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경, 존경, 존중, 경외 등의 단어들을 많이 듣기 힘들고 희소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권위가 인정되지 않고, 무시되고, 거부하며 왜곡시키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와 연결이 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존중의 원리입니다. 신앙은 관계고, 관계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고 이 태도의 한가운데는 존중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 존중의 원리는 인생을 열어가는 핵심적 주제입니다.

존중한다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보면 ‘가치 있게 여기다’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존중의 반대말은 경멸, 멸시입니다. 이것도 원어적으로 보면 ‘흔하다’ ‘천하게 취급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존중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 하였습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함으로 존중하게 하새서
아멘

2019년 월 1일 성품묵상-자기존중

2019년 월 1일 성품묵상-자기존중

존중 vs 무례함
"존중은 하나님이 섬기도록 명하신 사람들의 기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8월 성품묵상은 '존중'입니다. 존중하면 타인을 생각하기 쉽지만 자기 존중이 중요합니다.

흠모할 만한, 삶의 모델이 되어 나를 고양시키는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自己’를 존경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은 자화자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겸손謙遜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와 비교하여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매일 매일 발견하고 보완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현재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도달해야할 과녁에 몰입되어 있는 자입니다.

유대교의 예수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힐렐Hillel(기원전 110년-기원후10년)이란 랍비입니다.

바울사도의 선생인 가말리엘이 그의 제자입니다. 그가 <선조들의 어록> 14구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힐렐)은 이렇게 자주 말했다.  만일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한단 말인가?
만일 내가 나를 위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

“만일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한단 말인가?”

나를 위한다는 것은 내 존재감을 키워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보석 세공이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듯이 나의 인격을 다듬어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자신으로 변화시킬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존중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냅니다. 곧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존중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욕망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스스로 의사가 되려 하지 말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환자가 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교훈과 책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자기 욕망은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최산의 자기 존중입니다.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자는 내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자신의 토양의 산물입니다. 한 송이 민들레도 자신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그 토양의 자양분으로 꽃을 피웁니다.

나를 위한 유일한 사람은 결국 내 자신입니다. 오늘이란 시간, 지금이란 순간은 그런 나를 위해 몰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나는 나를 존경尊敬하십니까?  자신존경을 수련한자만이 타인을 존경할 수 있습니다. 자신안에 최선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최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존경이란 신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어 술잔(酋)을 손(寸)으로 높이 드는 행위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예를 갖출만한 인간인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만이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존경이란 진실로 강아지가 두 귀를 쫑긋 세우고(苟)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는 것처럼,

회초리(攵)를 들고 더 나은 자신을 관찰하여 더 나은 자신을 상상하는 용기입니다.

‘존경’(respect)이란 나는 내 자신을 보고(spect) 또(re) 보아, 자신에게 감동적인 자신을 하루라는 시간 안에 연습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나는 나를 존경尊敬하는가? 8월 한달 동안 나에게 몰입하는 단어입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욕망을 자제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소서.

성품묵상 - 출신성분

2019년 7월 31일
성품묵상 - 출신성분

신중함discretion vs
경솔함silmple-mindedness

"신중은 바람직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말과 행동과 태도를 삼가는 능력이다"

오늘은 7월 마지막 날입니다. 신중이란 성품수련도 정리하는 날입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과 함께 식사하러 가서 햄버거를 주문하기가 거북합니다. 그 사람은 두부와 케일 샐러드를 먹으니까요. 거한 음식을 시키면 겸연쩍어 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세상에 있는 기름진 음식이란 음식은 뭐든 먹습니다. 그런 분과 함께 식당에 가면 어떻습니까? 뭐를 시켜도 어떤 음식을 주문해도 부담이 없습니다.

이런 일은 영적 삶에도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과 자리를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영적으로 타락시키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큰 도전이 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질의 조크나 험담을 좋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어울리다보면 모르는 사이에 비슷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멀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변의 이방 국가가 하는 대로 거짓 신을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심판이 임박했다고 경고하셨으나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빌론으로 하여금 그들을 정복하게 하셨고 그들은 결국 낯선 땅 바빌론에서 70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나중에 바빌론은 페르시아에 멸망되고 그제야 유다인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난 다음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깊이 감동되어 저지른 죄로 인해 울었습니다. 느헤미야 9:2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모든 이방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제자리에 선 채로 자기들의 죄와 자기 조상들의 죄악을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경건하지 못한 국가들과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합니다. 영적으로 끌어내리는 사람이나 장소와 단절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주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들답게 사십시오.”(에베소서 5:7-8)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 행함은 출신성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근본적으로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자들입니다. 그러나 어둠의 자녀들은 그들의 조상은 마귀입니다.

행동의 동기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빛의 자녀들의 행동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반면에 어둠의 자녀들은 욕심입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습니다.

결과도 다릅니다. 빛의 자녀들의 종착지는 영생이지만 어둠의 자녀들의 도착지는 사망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그것은 먼저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데서 시작되어집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그 이름이라도 입에 담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담긴 삶은 자신을 지키는 영적인 자존심이 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판단 내려 주신 자신의 몸을 음행을 통하여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음행은 자신을 모욕하는 일일입니다

성도는 언어 생활에 있어서도 거룩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항상 감사하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누군가를 지적질 하는 마음은 자기의 그림자 일뿐입니다.

성도의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으므로, 그의 삶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삶을 삽니다. 

출신성분이 빛의 자녀인 사람은 어둠의 일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나쁜 일을 하자는 제안을 거절하게 하소서.

성품묵상 - 악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 하지 말라.

2019년 7월 30일
성품묵상 - 악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 하지 말라.

신중함discretion vs
경솔함silmple-mindedness

"신중은 바람직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말과 행동과 태도를 삼가는 능력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입니다. ‘철인황제’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의인의 길을 따르는 길은 성공의 비결이다. 반대로 악인의 길을 따르는 길은 실패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그가 무슨 일을 하던 그 사람은 형통하지만 악한 길을 가는 사람은 실패 뿐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죄의 길을 가지 않고 악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교만한 자들의 모임에 들지 않습니다.

악인의 뻔한 종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악인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을 여러 표현들을 사용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잠 1:10~)

'좇지 말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그 길을 밟지 말라.' 이것은 악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다윗이나 바울은 정확하게 이것과 일치하는 가르침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은 물이 묻듯이 악인을 가까이하면 악에 물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악을 가까이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더욱이 신앙인들 마저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결국은 낙심과 좌절에 빠집니다. 

시편에서 아삽이 악인이 형통하고 평강과 부귀로 교만해지는 반면에 경건한 성도들이 종일 재앙과 징책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실족하여 미끄러질뻔 하였다고 하였습니다(시73편).

인생을 살아 오면서 실수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돌이켜보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여 그런 사람을 지근거리에 두었을 때였습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나쁜 일을 하자는 제안을 거절힐 뿐만 아니라 악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성품묵상 - 거짓 선지자들

2019년 7월 29일
성품묵상 - 거짓 선지자들

신중함discretion vs
경솔함silmple-mindedness

"신중은 바람직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말과 행동과 태도를 삼가는 능력이다"

지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경험하면 지식이 높아집니다. 한마디로 많이 듣고 보면 지식이 늡니다.

이는 마치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여 얻는 것과 같습니다.책을 많이 읽고 애를 쓰면 지식을 얻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은사(恩賜)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많이 못했는데도 지혜가 출중합니다.

주님은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없이는 미혹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4-5

제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해도 지혜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식은 많은데 지혜는 없는 사람, 지식은 없는데 지혜가 많은 사람-한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 두 유형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인데 말하는 것을 보나 행동거지를 보면 도무지 지혜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학은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인데 사는 것을 보면 지혜가 눈부신 사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아브라함 링컨을 들 수 있습니다. 학교라고는 초등학교를 다녀본 게 고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 뭐라 해도 이 링컨이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해서 인류역사상 가장 진솔하게 우러름을 받는 으뜸의 정치가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지식은 둘째 치고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는 랍비가 곧 지혜자의 대표입니다. 지혜의 대변인입니다. 

지식을 주입해주는 단순한 스승이 아이라 지혜의 마음을 베풀어주기 때문에 랍비들이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은사인 것입니다.

참 지혜는 선행으로 표출됩니다. 참 지혜를 더하게 되면 그 지혜를 따라서 언제나 선행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어떻게 기회를 내어서든 선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참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거짓 지혜는 시기와 다툼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서는 좋은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거짓 지혜가 있는 곳에는 으레 시기와 다툼이 따라 나오고 악한 일들이 생겨난다는 말씀입니다.

주변에 거짓 선지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은 우리 영혼을 미혹합니다.

조심하고 그들의 속임수를 거부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나쁜 일을 하자는 제안을 거절하게 하소서

성품묵상 - understand

2019년 7월 28일
성품묵상 - understand

신중함discretion vs
경솔함silmple-mindedness

"신중은 바람직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말과 행동과 태도를 삼가는 능력이다"

사람에게 명예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 명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도 명예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법률에도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죄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심지어 영결종천(永訣終天)한 죽은 혼령도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면 다시 찾아와 신벌(神罰)을 내린다고 믿어왔습니다.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든 사람은 그 명예가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폄훼하며 두루다니는 한담하는 자들을 유의해야 합니다.

“두루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3)

본 장은 의인과 악인이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행동 양식과 결과는 서로 판이합니다.

의로운 자는 지혜로운 자이고, 악한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그들의 선악, 지혜와 미련은 그들의 언어 생활에서도 나타납니다.

악한 자는 그의 입을 잠시도 그냥 두지 못합니다. 그는 끊임없이 떠들어댑니다. 그가 말하는 내용 역시 무가치하여 이웃을 멸시하고 남의 비밀이나 누설합니다.

악인의 입은 이미 세워진 것이라도 헐어 버립니다.

반면에 의인은 그의 입을 지킬 줄 압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 주고,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말을 하며 그의 복을 비는 말은 모든 좋은 일들이 잘 진행되게 합니다. 

 “의인의 입술은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 없이 살다가 죽는다.” (잠 10:21)의인의 말과 미련한 사람의 말은 그 말의 영향력에서도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의인의 말은 정직하고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의인의 마음에는 분별력이 있고, 그 분별력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에는 선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언어와 입술의 힘입니다. 한 치 혀를 가지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영향력, 살리는 언어생활을 위해서는 언어생활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변하고 마음이 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의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숨은 생각이 혀를 통해 나오는 것이 곧 언어입니다.

그래서 언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 속에 있는 마음 상태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명철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명철은 한자로 밝을 명에 밝을 철로, 총명하고 사리가 밝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살펴보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명철한자는 Man of understanding입니다.

understanding 즉 촉명하고 사리가 밝은 자는 타자를 이해를 잘 하는 자입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understand라는 말 그대로 Under 아래서, 또는 낮은 곳에 Stand 서볼 줄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잘 이해하려면 그 사람보다 낮은 곳에 서서, 겸손히 그 사람 편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내 생각만하고, 내 입장만 주장해서는 남을 알고,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편에서 생각하고 좀 더 깊은 배려와 대화가 필요합니다.

신실한 자는 소문을 퍼뜨리지 않고 비밀을 지켜 줍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능력과 지혜를 주소서. 아멘

성품묵상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2019년 7월 27일
성품묵상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신중함discretion vs
경솔함silmple-mindedness

"신중은 바람직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말과 행동과 태도를 삼가는 능력이다"

우리 신체구조에는 조물주 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팔을 주신 것은 사로를 껴안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입과 두귀를 주신 것은 말은 적게하고 듣는 것은 두배로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열 손가락을 주신 것은 이웃사랑은 두루두루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한 심장을 주신 것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있습니다. 당신만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동물과 달리 언어를 주신 것은 언어의 집에서 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생각을 담는 집입니다.

누근가를 만났을 때 5분만 참고 들어 보십시요. 그 사람이 어떤 집단에 살고 있는 알게 됩니다.

언어에서 국적이 드러나고, 가치관이 드러나고, 세상을 인식하는 세계관이 드러납니다.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 드러나고, 교양이 드러나고, 신앙의 진실성이 드러나고, 그 사람이 살아 온 삶의 여정이 드러납니다.

마음은 보물 창고입니다. 말은 그 보고로부터 나옵니다. 마음에 좋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음에서 좋은 것들을 내놓게 됩니다.

은혜, 위로, 경험, 좋은 지식, 좋은 감정, 좋은 결심들, 이런 것들이 마음 속에 있는 좋은 보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보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많은 재물이 있는 체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곧 파산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무익한 말에 관해서 말씀하시며 그 말이 지니고 있는 악을 보여 주십니다(마 12:36,37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혹은 담화를 '하든지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

공허하고 무익하며 무례한 말은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만듭니다. 그런 말들은 우쭐대는 경박한 마음에서 나오는 산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이런 무익한 말들에 대해서 분명코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7절).

우리 대화의 부단한 취지가 은혜롭거나 은혜롭지 못한 데 따라서 그것이 우리를 위하거나 반대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언어는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타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자도 자신이 어떤 설교자인지 스스로 드러냅니다.

저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놀랄 때가 많습니다. 직접적으로 교제하던 친구가 페북에서 드러나는 인격이 너무 다름을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닦는 미메시스(연습)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하나님의 심문을 받는 척도가 될뿐입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리는 말을 하게 하소서. 우리 마음이 단물이 솟아 오르는 맑은 샘터가 되게 하소서. 아멘

성품묵상 - 관용을 알게 하라

2019년 7월 26일
성품묵상 - 관용을 알게 하라

신중함discretion vs
경솔함silmple-mindedness

"신중은 바람직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말과 행동과 태도를 삼가는 능력이다"

옛날, 중국 제 나라에 관중과 포숙이라는 둘도 없이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장사를 해서, 관중이 이익을 더 많이 가지면, 포숙은 "그가 집이 가난한 때문이야"하고 이해하였고, 또 관중이 사업에 실패하고,

과거에도 세번이나 낙방을 했을 때에도 포숙은, "관중이 때를 잘 못 만난 탓이야. 그의 재능이 아까다!"하고 아쉬워 했습니다.

관중이 전쟁에 나가 세번이나 도망쳤을 때에도, "그에게 늙으신 어머니가 계신 때문이야"하고 포숙은 끝까지 관중의 인품과 처지를 이해하려 하였습니다. 

훗날, 관중은 "세상에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은 오직 포숙뿐이다!"하였습니다.

지금도 변함없는 우정, 뗄 수 없이 가까운 사이를 일컬어, '관포지교'라 하지 않던가! 오래 지킬수록 빛나는 것은 우정입니다! 

성도는 타인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성품이 자신에 대해서는 온유한 성품이 필요합니다.

관용의 미덕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사랑, 친절, 긍휼, 평강, 온화함, 점잖음, 합당함, 조화하는 능력들 많은 다른 미덕들을 포함합니다.

관용의 반대는 엄격한 방식을 따라 하는 것이다. 관용이 결핍된 사람은 엄격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요구를 갖는 것입니다.

"관용하며”(ἐπιεικείς, 에피에이케이스) ‘너그러우며, 인내하는, 점잖은’이란 뜻이다.타인의 인격과 권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온유함”(πρᾳότητα, 프라오테타)는 야생 짐승을 길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함은 힘없이 비실비실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절제되이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온유함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꾸준하게 드러나는 덕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딛 3:2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등 대립되는 것을 만드신 것은 인간이 언제나 대립하는 것을 갖추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은 언제나 두 대립하는 것 사이에 살아가며, 두 대립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가야 합니다.

남자 안에도 남자의 늠름함과 여자의 상냥함이 공존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남성이란 남자의 강함과 여자의 상냥함을 겸비하고 있는 자다." 

당신이 만일 오늘 용서와 관용을 선택한다면,무엇보다도 당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평화가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편안함과 관용과 자비가 샘솟듯이 밀려오게 되며 그렇게도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거짓말처럼 다 이해가 되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사람들을 친절하고 온유하게 대하는 선한 시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성품묵상 - 수직사랑

2019년 7월 25일
성품묵상 - 수직사랑

신중함discretion vs
경솔함silmple-mindedness

"신중은 바람직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말과 행동과 태도를 삼가는 능력이다"

레위기 19장은 부모 경외와 여호와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평행구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평행관계를 이루고 있는 이 두 명령은 십계명의 요약이기도 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이 두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첫 걸음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사랑'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안식일을 가룩하게 지키는 데서 시작한다.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시간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으로서 안식일 이외의 다른 시간도 하나님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경외하며 공경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면,

부모를 경외하는 기본자세 역시 부모의 소중한 시간을 기억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향한 사랑과 경외가 시간이라는 그릇 속에 담기는 것이 기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려면 늘 부모를 향하여 마음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의 기본으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처럼,

부모의 중요한 시간을 기억하고 정성껏 그 시간을 존중히 여기는 것은 부모 공경의 기본이 될 수 있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32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공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노인은 인생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회중이 모인 자리에 노인이 들어서면 그를 공경하는 의미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예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전으로 전수되던 시대에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한 증표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를 정죄했습니다. (사 3:5절)  

이렇게 노인을 공경하라는 의미를 통하여
모든 윗사람을 존경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노인을 공경함에는 가장 먼저 나이드신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입니다. 이는 수직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근대화 이후에 수평사회구조는 평등사상과 더불어 발전했지만 수직사회구조는 많이 무너졌습니다.

이로 인해 권위가 상실된 사회로 치닫고 있습니다.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나 교회는 이 둘이 잘 조화를 이룰 때 세워집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은 출발점이 수직사랑에서 시작된다는 비밀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노인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것처럼, 가정에서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하나님 경외와 함께 부모 공경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받게 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노인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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