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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신앙 땅끝신앙을 꿈꾸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목민교회] 담임목사 이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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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지성인의 삶 : 3월의 책 - 천로역정

기독지성인의 삶 : 2월의 책
존 버니언 [천로역정]

책, 이 시대를 사는 신앙인들의 내면을 든든히 채워 줄 세계 기독교 명작을 엄선했다. 세대 간의 다리가 되어 바른 신앙이 다음 세대에게 전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이 시리즈의 첫 책은 기독교 명고전, 존 번연의 <천로역정>(1678)이다. 17세기 영국에서 탄생한 <천로역정>은 당시 시대상에 갇혀 있지 않고, 오늘날도 계속되는 보편적인 사람의 심리, 신앙인들의 내적 씨름과 신앙 여정을 더없이 세밀하게 그린다. 또한 고루한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을 생동감 있게 전수한다. 어려운 훈계조로 교리를 늘어놓는 대신, ‘이야기’라는 좋은 도구를 사용해 사람들이 쉽게 읽고 더 깊이 공감할 수 있게 했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 세계 베스트셀러로 자리 매김한 위대한 문학 작품의 비결이다.


매주 순차적으로 2~3편씩 링크를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보내드리는 링크와 상관없이 개인의 스케쥴에 따라 들으시면 됩니다 ^^



[1편 듣기]
https://youtu.be/TrMW-EJHTJY

[2편 듣기]
https://youtu.be/0zU3CrJYdAo

[3편 듣기]
https://youtu.be/rWd1936Eb1o

[4편 듣기]
https://youtu.be/bMHQuEF6_NQ

[5편 듣기]
https://youtu.be/tQUh8ovsAMk

[6편 듣기]
https://youtu.be/xgn2Yq5qSNc

[7편 듣기]
https://youtu.be/wjr8nmXVmMI

[8편 듣기]
https://youtu.be/8izpUlj39I8

[9편 듣기]
https://youtu.be/bSvmPiBCylY

[10편 듣기]
https://youtu.be/ehkwkzEYlUA

2020년 2월 24일 성품묵상 - 유연성/변화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에는 스프링밧크라는 양떼가 살고 있습니다.

이 양들은 떼를 지어 풀을 뜯어먹다가, 무리가 많아지면 더 넓은 풀밭을 찾아 집단이동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한 놈이 뛰게 되면 다른 놈들은 멋도 모르고 뛴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가속이 붙어 굴러 떨어져 집단자살을 하고 만다는 겁니다."

우리들이 몸담아 살고 있는 이 세대를 단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얘기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성도가 실제 삶에서 취해야 할 소극적 자세로서 "악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계속 이 세상과 같은 모양이 되지 말라’ 혹은 ‘너희는 자기 자신을 이 세상과 동일시하지 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본받지 말고’는 말은  ‘~과 같은 모양이 되다’, ‘따르다’, ‘이끌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빠져 들어 자신을 세상에 내어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상의 풍조를 모방하고

그것을 삶의 표본으로 삼으라고 유혹을 가해 오지만 우리는 이러한 유혹을 과감히 거부하라는 말입니다.

너희 생활을 이 세상의 온갖 유행에 맞추려고 하지 말아라. 주위의 색깔을 따라 변화하는 카멜레온과 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를 ‘그러나 너의 마음 혹은 생각하는 방식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받으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스케마’가 아니라 쉽게 변하지 않는 ‘모르페’, 즉 우리 존재의 본질적 요소의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면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의 본질적 요소인 속사람의 근본적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 즉 ‘누스’를 갱신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헬라어에는 새롭다는 뜻으로 쓰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시간의 입장에서 볼 때 새롭다는 뜻을 가진 ‘네오스’와 성질의 입장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카이노스’가 그것입니다.

‘누스’의 갱신이 시간이 지남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의 입장에서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있는 내면의 갱신(renovation)은 삶을 놀랍게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더 이상 육체의 본성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로 깨끗하게 되고 새롭게 됩니다.

죄로 오염된 자연인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누스’의 갱신을 통한 변화가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악한 세대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하반절에서는 그 결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누스’의 갱신을 통해 변화를 받아야 하는 목적이 바로 철저한 검증에 의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파악하기 위함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때 이와 같이 신적 속성을 지닌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참된 예배는 우리의 변화된 삶입니다. 

우리 생의 매순간순간과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중심이 되시고 생의 주인이 되실 때에 이것이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변화를 받아서 옳음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21일 성품묵상 - 유연성/편견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편견”이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쳐서 공정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편견은 오해와 오판(誤判)을 만듭니다. 

불행의 씨앗입니다. 좋은 것을 안 좋은 것으로 여기고 안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행복과 좋은 기회를 놓칩니다. 편견은 무지의 산물이고 오만과 고집의 산물입니다.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면 변화나 진전, 행복, 창조를 이룰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자신들 만이 선택받은 사람이고 이방인들은 버림받은 자라는 편견입니다. 

이방인들을 더러운 동물에 비유하며 상종 할 수 없는 자들로 여깁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편견을 깨기 원하셨습니다.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행 11:9)
"
이것은 훗날에 교회 안에 들어오는 이방사람들에 대한 환상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짐승들(이방인들)을 더럽다고 기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과는 상종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너무 다릅니다.

세계 복음화는 편견을 깨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야 국경과 인종과 종교와 문화를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명에 따라 베드로는 가이사랴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을 가까이할 수 없는 속된 존재로 생각했지만 성령이 명하실 때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문화적 편견을 버려야 했습니다. 민족주의, 협소한 민족주의적인 우월감도 버려야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문화에 집착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기문화권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잘 길들여졌기 때문에 스스로는 얼마나 자기문화 속에 깊이 침륜, 투옥되어 있는지를 모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편견을 넘어서기를 원하십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기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과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노키아는 핀란드에 본사를 둔 글로벌 통신 네트워크 솔루션 회사입니다 노키아는 핸드폰을 단지 통신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애플은 핸드폰을 컴퓨터로 생각했습니다. 이 유연한 생각이 아이폰을 탄생시켰습니다.

편견을 넘어 설 때 지경이 넓어집니다.

지독한 안티 크리스천 사울도 열렬한 크리스천 되고 타락한 어거스틴도 최고의 성자가 됩니다. 

인신매매범 죤 뉴톤도 "Amazing Grace"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절).

2020년 2월 20일 성품묵상 - 유연성/재건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유연성은 회복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20일 성품묵상 - 유연성/재건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신문을 보면 '개혁, 변화, 갱신,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저런 단어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재건의 소리들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대답은 하나같이 궁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위기의식을 느끼기는 하지만, 느혜미아와 같은 의지는 없는 셈입니다.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힘'이나 '능'은 인간적인 방법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적 수단과 방법들을 비웃으시며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느 4:16~18)

성벽은 고대 사회에서 안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왕들은 성을 가능한 한 두껍고, 높이 쌓아서 적들의 침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바빌론의 느붓갓네살왕 때 쌓은 바빌론성은 높이가 100피트, 두께가 380피트로 성벽 위로 마차 두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고 하는 비전을 가지게 된 것은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다녀온 사람들이 그에게 슬픈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괴로움과 수치를 당하고 있고, 성벽은 무너져 내리고 성문은 불타버린 채로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슬퍼져서 그 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조상들과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회개(confess)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 가운데 주신 성벽 재건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단호한 결심(commitment)을 합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곳에 도착해서 다른 사람들 몰래 한 밤 중에 일어나 무너진 성벽을 둘러 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가집니다.

그리고 성벽재건을 시작됩니다. 그런데 성벽 재건 과정에 그것을 방해하는 대적자들이 생깁니다.

느헤미야는 외부인들의 협박과 내부인들의 낙심에 직면하였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질적인 대응책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기시킴으로써 백성들을 주의 사역에 전념하게 했습니다.

한 손에는 쟁기를, 한 손에는 병기를 이스라엘은 조여오는 적들의 공격에 맞서면서도 건축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손에는 건축연장을, 다른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습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칼을 차고 건축에 임했고, 그 곁에는 나팔부는 자가 서있었습니다. 긴장이 극도에 달해있는 모습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무너진 성읍들’을 재건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한 폐허에 해당되는 상황은 많습니다. 깨어진 관계가 될 수도 있고 개인적인 신앙의 무기력함이 될 수도 있으며 무너진 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초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모범을 통해 ‘반대’에 직면할 때의 교훈을 배웁니다.

그러한 반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주변인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길을 따라 막아서는 대적의 책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돌이켜 기도하고 대적들 앞에서 중보합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의 무너지 성벽을 재건하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19일 성품묵상 - 유연성/조정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예기치 않은 문제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문제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느껴야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많은데,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외면하려 합니다. 문제를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문제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직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면하려고 합니다.

문제가 커져서 병이 됩니다. 문제가 커지면서 우울증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상황을 가래를 동원해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합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자신이 풀기에는 문제가 매우 크기 때문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망하는 존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절망은 인간이 늘 직면하는, 실존적 문제입니다.

큰 문제를 만나면,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절망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절망의 순간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은 열린 문입니다. 절망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입니다.

학생들이 문제를 풀어가면서 실력이 자라듯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믿음이 자랍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이 예기치 않은 문제를 만났습니다.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막 2:3-5)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찾아왔지만 많은 사람들로 인해 주님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주님이 계신 방 안에 중풍병자를 들여보냈습니다.

이들이 맞닥뜨린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중풍병이었습니다.

네 사람은 이 중풍병 환자를 상채로 메고 예수님께 가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애써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이 계신 가버나움의 한 집으로 갔더니 이미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집안은 물론이고 집 바깥 문 앞에도 그야말로 꼼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직면한 세 번째 문제는 ‘지붕’이었습니다.

이들 눈에 바로 지붕이 보였습니다. 이제 네 사람은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네 사람의 문제해결 방법은 무엇이었까요. 한마디로 문제를 만날 때마다 절망이나 포기하지 않고 상황을 조정합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이 중풍병자가 반드시 치유 받을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협력하는 태도’입니다.

네 사람이 상의 한 귀퉁이씩을 메고 왔던 것처럼 또 상을 함께 지고 지붕을 향해 계단을 올라갑니다.

뿐만 아니라 지붕을 뜯고 네 귀퉁이를 끈에 달아 내립니다.

그리고 이들은 마지막 세 번째로 앞을 가로막은 지붕이라는 장애도 거침없이 뜯어냅니다.

네 사람은 급한 대로 손으로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을 떼어내 들보 사이로 제법 큰 구멍을 뚫은 것입니다.

이 네 사람은 가능성을 보고 도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군중들과 이 네 사람 간의 또 하나의 차이점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들의 확신, 협력, 적극적인 태도와 용기를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문제를 만났을 때 유연성아 필요합니다. 문제는 해결하는대 가장 유용한 지혜는 유연성입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지붕을 뚫게 해 주세요. 아멘

2020년 2월 18일 성품묵상 - 유연성/소각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밤에 배를 저어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30분이면 건널 수 있는 강인데 몇 시간 노를 저어도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술도 깨고 동이 훤하게 튼 다음에 자세히 보니까 거룻줄을 육지에 묶어 둔 채로 밤새도록 노를 저었습니다.

우리가 전진하며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려면 과거를 청산하고 잊어버릴 것은 잊어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 43장 18~19절에도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엄청난 새 일을 행하시고 나타내시려고 하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도 하지말고 옛적 일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행 19:19)"

오늘 본문에서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아의 아들들이 바울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따라 하다가 오히려 악귀 들린 이에게 공격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을 보고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자복하며 회개합니다.

마술을 행하던 자들까지도 회개에 이어서 삶에서도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들에게 큰 재산이나 다름없었던 마술책들을 모아서 불살랐습니다.

이 소각된 책들의 가격은 은 오만으로 추산되었습니다.

그 책들이 악마의 서적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것들을 다시 판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는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은 마술을 행하던 죄악된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다는 확실한 마음의 결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과거에 범한 죄악에 대하여 의분을 나타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미련을 남길 수 있는 유혹을 제거했습니다.

과거는 잘했건 못했건 이미 지나가 버리고 지금 없는 것입니다. 잘했으면 한번 자축하고 지워 버릴 일입니다.

잘못했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한번 명심하고 불에 태워 버릴 일입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에 인생의 여정에 어떠한 집착도 금기입니다.

지나간 영광의 시간에 너무 오래 취해 있거나 흘러간 고통의 시간에 너무 오래 갇혀 있으면, 미래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며, 지나간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교훈뿐입니다.

독일의 바이츠체커라고 하는 대통령이 세계 제 2차대전 패전 40주년 기념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에 대하여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을 멀게된다."

역사는 인간의 실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그 전쟁 속에서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매이면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잊으면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과거를 떠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 안에 죄악을 소각하고 내일을 맞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17일 성품묵상 - 유연성/산파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 행위를, 산파였던 자기 어머니의 행위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어머니가 여인의 뱃속에서 아이를 받아내듯, 자기도 인간의 지적 사유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비유를, 만삭의 임산부 배에서 아이를 받아내듯이 소크라테스도 상대방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비유에는 그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철학이란 생각을 한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들을 체에 걸러 꼼꼼히 검토하여 지속 가능한 견고함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결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인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동물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소크라테스 당시에는 아이를 낳으면 산파가 신생아를 아주 차가운 물에 담갔다고 합니다.

즉 건강한 아이만 생존할 기회, 건강한 아이들만 살려두겠다는 시험을 해보는 역할을 하던 사람이 바로 산파였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철학을 산파에 비유한 것은 막 태어난 신생아를 찬물에 담가 생존 가능성 여부에 대한 시험입니다.

약간의 반론에도 맥없이 무너지는 허황한 생각을 걸러내는 작업은 애굽황제가 건강한 사내 아이들이 애굽체제 위협이 될 것임을 알고 걸러내는 작업과 유비됩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과 지혜는 민족의 지도자 를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모세를 돕는 동역자들을 탄생시켰습니다.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 1:17).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습니다." (출1:15-17)

산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아이의 목숨을 앗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막을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보자.

이것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결심만큼 중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왕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국가 공권력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불복종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게다가 파라오의 취조에 ‘히브리 여인은 힘이 좋아서 우리가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았습니다’라고 거짓으로 보고하였습니다.

이들의 절박한 선택으로 살아난 남자 아이들은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내아이들이 자라서는 모세를 도와 애굽을 떠날 때 이스라엘을 이끄는 중간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의 결단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브라와 부아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임했다는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맺습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이 산파들이 파라오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서는 ‘무엇이냐’할 때의 무엇(What)이란 단어와 인간(Man)이란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인간은 ‘무엇이냐’라고 질문하는 존재란 의미일 것입니다.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국가권력을 따를 것인가? 이에 대한 질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들은 현실적인 권력에 항명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유연성을 발휘함으로 새로운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변화의 기회를 얻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14일 성품묵상 - 유연성/고집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솝의 작품 중에 "나귀의 고집"이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집이 무척 센 나귀를 몰고 산 길을 지나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이  나귀가 곧은 길에서 벗어나 낭떠러지 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안심하고  느긋하게 뒤따르던 나귀 주인은 순간 큰일났다 싶어서 얼른 나귀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나귀를 끌어 올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귀는 도로 올라오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낭떠러지 쪽으로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한참 동안 당기고 내빼려는 씨름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잡고 있던 꼬리를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귀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올바른 길을 권유하는 것을 뿌리치고 자기 고집대로 했던 결과입니다.

21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 너희에게 전하였어도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렘 42:21)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들은 요하난과 그의 일행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고집의 결과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의한 죽음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자기들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자기 고집의 결과는 심판입니다. 끊임없이 반역하는 악인들의 운명은 예측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1,000개의 거울로 된 유리 홀이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손을 내밀면 천 명의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며, 또 살며시 웃으면 천 명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웃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손과 웃음은 모두 자기 자신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자신에게 몰두되어 있고, 자신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자신에 의해 갇혀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눈은 오직 자신만을 향해 있으며, 그의 목은 자신을 만족시켜 줄 아첨과 찬사의 말에 목말라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주님, 저희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낫다 싶으면 금새 교만해지는 좋지 못한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저희의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어 주시길 원합니다."

교만은 선을 악으로, 축복을 저주로, 아름다운 것을 허영으로 바꿉니다.

오직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없다면 그것은 로버트일 것입니다.

내 고향 대천에서 인천에 오는 길은 여러갈래입니다. 한 길이 막혔다고 상경을 포기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유연한 마음이 자유함을 줍니다. 고지 곳대로 뻣뻣하게 살다가는 부러지개 됩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유연한 성품으로 회복시켜 주소서. 아멘

2020년 2월 13일 성품묵상 - 유연성/고집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세 명이 나와요. 먼저 탕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그 뒷모습만 보입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맨발에 상처투성이 입니다.

그 뒤로 탕자를 안고 있는 아버지는 자애로운 얼굴도 보입니다.

그 옆에 맏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탕자와 아버지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얼굴에는 기쁨도 없고, 자기 의에 도취된, 정죄하는 자세로 서 있습니다.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표면적으로 보이는 탕자는 둘째아들입니다. 하지만 깊이 성경을 들여다 보면 맏아들이야말로 제대로 된 탕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겉으로 보면 맏아들이야 말로 한번도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는 완벽한 사람입니다.

탕자동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성실히 밭을 갈고 있는 하나님나라 일꾼입니다.

하지만 맏아들 마음그릇에는 탕자가 찼던 쪽박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말로는 한 번도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아버지 만을 섬겼다라며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떻습니까? 단 한번도 동생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며, 먼 동구 밖에서 고추발로 서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집에 살기는 해도 마음은 늘 밭 [내 재산]에만 가 있습니다.

동생이 돌아온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보다는 일이 우선입니다. 자기 밭 갈기에 바뿔 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열심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동생은 집을 떠나 수 천리 길을 갔지만, 맏아들은 집안에서, 바로 아버지 곁에서, 수 천리 길을 떨어져 있습니다.

맏아들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길길이 날뜁니다.

마음 속으로 동생을 몹쓸 놈, 파렴치한으로 이미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동생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께 따지며, "창기과 재산을 탕진해 버린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곧바로 정정해 주십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

맏아들은 자기 기준으로 도덕적이 잣대로 하나님의 은총을 해석하고, 창기와 세리를 무시하고 정죄했던 바리세인을 상징합니다.

자기들은 절대로 죄인이 될 수 없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자세가 돼있지 않은, 그야말로 집을 나가도 아주 멀리가 있는 탕자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기가 탕자인줄도 모른다는 겁니다.

C.S 루이스가 옥스포드대 채플에서 설교하고 나왔을 때 한 젊은이가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신이 살아 계시다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이 세상에 왜 이다지도 많습니까?”  

루이스가 대답합니다.  

“젊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아도 오만하고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라네.”

고통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고집 부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12일 성품묵상 - 유연성/희망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일사유사(逸士遺事) 라고 하는 고전에있는 이야기 입니다.

한양에 김학성씨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두 아들, 형제를 서당에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여느 날과도 같이 그날도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 비오는 날 처맛물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주룩주룩,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울림 같은 소리가 나서 ‘이상하다’ 여겨서 처마 밑을, 땅 밑을 파보았습니다.

그곳에 커다란 가마솥이 있고, 그 솥뚜껑을 열어보니까 그 속에 은이, 은전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잦았던 난리로 인해서 재물을 이렇게 가마솥에 넣어서 땅에 묻어놓고 피난을 갔다가 못 돌아오고 다른 곳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 가난한 어머니는 재빨리 그 뚜껑을 덮고 그리고 되묻어서 흙으로 다 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을 팔고 조그마한 오막살이로 옮겨가서 어머니는 여전히 삯바느질을 하면서 두 아들을 애써 가르쳐서 훌륭한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두 아들을 불러놓고 그 옛날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땀 흘리지 아니한, 또 갑작스럽게 얻은 재물이라는 것은 곧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잘못된 기대는 그 자체가 실망입니다.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19~20)

바울은 성도들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감옥에서 풀려나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그리거 자신은 오직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온전히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이 간절히 희망하는 것은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희망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삶 자체에 중요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달 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만난 복음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어떠한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나, 어떠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큰 기대를 했다가 실망을 경험한 적이 한두번 아니었을 겁니다.

희망은 자신이 바라는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나 예측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실현 시간이 불명확합니다.

언뜻보면 기대나 희망의 뜻이 중복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대하는 대상이나 희망하는 대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새로 취임 할경우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라고 하지 "희망이 큽니다라" 하지 않습니다.

기대란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이거나 그 일 자체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이란 자기 자신에 관련되거나 어떤 목표, 비전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3-5

인간에 대한 기대는 절망을 낳고 하나님만 우리의 희망이 되십니다.

기도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게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2020년 2월 11일 성품묵상 - 유연성/애착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융합은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하여지거나 그렇게 만듦 또는 그런 일을 의미합니다.

4차 산업시대에 접어들면서 요리사 농부, 테크니컬 라이터, 사용자 경험 디자이너 등 서로 다른 직무와 기술이 융합한 새로운 직업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시대는 전공의 영역과 구분이 분불명해지고 서로 통합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시대입니다.

유연성은 딱딱하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성질을 말합니다.

최근 인문학 계열이 강했던 하버드 학생들이 컴퓨터 공학 강의 참여 열기가 매우 뜨겁다고 합니다.

한가지 전공 뿐만 아니라 다방면을 탐구하는 유연한 태도가 요구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유연성이 중요한 소양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땅 으로 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엘리아에게 바칩니다.

엘리아나 사르밧 과부는 모두 유연성을 발휘함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4)"

지금 엘리야는 아합왕과 그의 부인인 시돈공주 출신인 이세벨을 피해 그릿 시냇가로 숨으라고 하셔서 피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말씀을 받아 순종하여 엘리야가 시돈땅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한 과부를 만나게 됩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먼저는 물을 달라했고 그리고 떡 한 조각을 달라 했습니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것을 달라고 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당시의 상황이 3년6개월 동안 비가 오지를 않아 물이 귀할때 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상황에서 물을 달라 했던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과부는 아무말 없이 엘리야 에게 물을 갔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떡 한 조각을 달라 했을때는 이 과부가 엘리야 에게 한 대답은 불만에 찬 말투로 자기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떡이 없고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를 주어다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 죽으리라"

말속에 세상에 대한 원망섞인 자기 신세를 비관하는 논조의 말을 엘리야 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과부의 사정을 알지 못한 엘리야가 과부의 사정을 다 듣고서 한 말은 " 두려워 하지 말라 "입니다.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 고 말씀합니다.

과부의 입장에서 보면 엘리야는 너무나 뻔뻔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과부는 받아들이고 유연성을 발휘 합니다.

과부도 마지막 남아 있던 것을 가지고 엘리야가 말씀한대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지금 마지막 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붙잡고 있는 동화줄 같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부유함과 가난함에 있지않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상황에 매여 유연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유연한 자세로 세상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10일 성품묵상 - 유연성/교훈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분재는 뿌리를 잘라주지 않으면 죽고, 사람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빨리 늙는다.”

제주 한경면에 있는 ‘생각하는 정원’이란 식물원의 안내 멘트 중 한 대목입니다.

왜 분재는 뿌리를 잘라주지 않으면 죽는 것일까요.

식물은 화분 속에서 뿌리 생장을 계속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화분 속이 뿌리로 꽉 찹니다.

전문가들은 분갈이를 할 때 굳은 뿌리를 낫이나 가위로 깨끗이 잘라낸다. 그렇지 않으면 식물이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고 합니.

자연 상태의 나무는 주변의 양분이 고갈되거나 뿌리가 노화되면 고사(枯死)합니다.

반면 분갈이를 주기적으로 해주는 분재 식물은 자연 상태의 동족보다 훨씬 오래 삽니다.

관리만 잘 해주면 무제한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분재의 수명 연장 비법은 인간의 삶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낡은 생각을 주기적으로 잘라내야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의 뿌리가 돋습니다.

오래된 생각과 아집(我執)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젊더라도 생각이 늙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무 비유를 들어 시대를 분별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눅 21:29~31)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의 싹이 나면 사람들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듯이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면 곧 종말이 임하고 있음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의 징조는 신적 권위를 가지시고 심판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가리키는 동시에 온 인류에게 심판이 임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 있어서는 성도들이 누릴 하나님 나라의 평안도 아울러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흑암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웠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악의 권세가 더욱 맹렬할수록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위축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 3:2)

인생의 시작과 끝을 언급하되 우리 인생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인생이 세상에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요, 갑자기 어디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허망한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일, 때를 분별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서 살아가는 일,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게 하시기 위해 때를 따라 피어나고 열매 맺는 자연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자연의 변화에서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세요. 아멘

2020년 2월 06일 성품묵상 - 유연성/회개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대형 여객선이 서인도제도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항해 중에 있는 배의 선장이 키잡이가 배를 곧바로 암초를 향해 항진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갑판을 닦는다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물을 퍼낼 준비를 시킴으로써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배를 구조하려면 배의 진로를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재빨리 명령을 내리고, 배는 방향을 돌려 위험을 모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죄라는 위험한 바위에서 방향을 돌려 안전한 항구로 나아가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키를 돌릴 때 배 전체가 방향을 바꾸듯이 마음의 변화는 삶의 변화를 낳습니다.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7-38)

그러면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살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했습니까?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라”(μετανοησατε)고 하였습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σωθητε)”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내일부터 하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지금 여기서 결단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받다’(βαπτισθητω)는 ‘잠긴다, 동화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물에 잠긴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신랑신부가 혼인을 통해 연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무와 가지가 연합함으로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발사와 목사가 나란히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발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고 가난하냐고 기독교의 모순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이 머리가 길어 지저분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목사가 왜 이발사가 있는데 저 사람은 머리가 길도록 깍지 않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발사는 "물론 그가 내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가난하고 악하게 살아 가는 것입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회개하고 변화를 받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05일 성품묵상 - 유연성/개혁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대형 여객선이 서인도제도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갑판에서 애완용 개와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개는 소년이 공을 던지면 쏜살같이 달려가 공을 물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던진 공이 크게 튀면서 바다로 빠졌습니다.

개는 주인이 던진 공을 물어오기 위해 파도가 높은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소년은 선장에게 달려가 배를 멈추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배를 멈출 수는 없다"
선장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이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선장은 할 수 없이 배를 멈추었습니다.

소년의 생명을 포기하고 항해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소년과 강아지는 모두 무사히 구출됐습니다.

거대한 여객선은 개 한 마리로 항로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에 항해를 멈추었습니다.

국가의 개혁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모든 개혁에는 반드시 그만한 희생이 따릅니다.

뿜만 아니라 희생의 크기에 따라 개혁의 폭도 달라집니다.

"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대하 34:31)

하나님이 훌다를 통해서 요시야에게 응답하신 말씀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유다가 율법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에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한 것인데 죄는 조상들이 짓고 심판은 당대 사람들이 받습니다.

조상들과 당대 사람들이 운명공동체로 여겨집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누적되어온 죄값이 한계점에 달하여 멸망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요시야의 겸손과 눈물과 기도를 보았으므로 그가 죽을 때까지는 유다의 멸망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시야의 개인적인 운명을 백성의 운명과 분리하고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개인의 자격으로 율법 앞에 회개합니다.

요시야 왕은 백성들을 행하여 회개를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사장이나 서기관 그리고 어떤 백성도 왕과 함께 회개의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다.

회개에 이른 유일한 사람은 요시야 왕입니다. 그렇다면 회개한 대가가 무엇입니까?

요시야의 사는 날 동안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기게 됩니다.

요시야의 개혁이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취소시키지는 못했지만 유다의 영적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의 70년 포로 기간 동안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이 되었습니다. 

라합은 가나안 족속의 창녀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린아이와 짐승들까지 죽는 데서 구사일생합니다.

그녀가 숨겨준 정탐꾼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과 오벳,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을 낳고, 다윗의 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십니다.

다른 사람은 다 저주를 받았는데 라합만은 살아납니다.

라합은 어떻게 해서 자신을 지배하던 저주의 사슬을 끊고 남다른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병원에 가면 심장병, 당료병 등, 항상 가족력을 확인합니다.

영적인 원리더 마찬가집니다. 죄도 저주도, 불행도, 은혜도, 복도 다 그렇습니다.

절대 당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식에게로 후손들에게로 대물림 됩니다.

사실 생물학적 유전보다 정신적이고 종교적 유전, 영적 유전이 더욱 집요합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윗대로부터 내려오는 나쁜 배경으로 고생하는지 모릅니다. 저주의 유전입니다.

조상의 죄는 삼사 대까지 하나님의 은혜는 천 대까지 이릅니다.

나 한 사람의 변화가 후손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변화를 기대하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04일 성품묵상 - 유연성/종말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회장이 절두산 성당의 차희봉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중앙일보에 공개되었습니.

그가 죽기 1달 전에 보낸 종교에 관한 24개의 질의서입니다.

차신부는 그 질문서를 카톨릭대 교수에게 보냈고 그는 이회장과의 접견날짜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회장은 그 질문의 답을 미처 듣기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첫 번째 질문,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신은 왜 히틀러 같은 악인을 만들었는가?

성경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사실 인간의 이런 원초적인 질문들은 이미 성경에 정확한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24번 질문은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구의 종말에 대한 해답을 듣기 전 자신의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역사적인 지구종말 뿐 아니라 그보다 앞서 자신의 개인적 종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그분의 질문을 보며 인간 내면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동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회장의 마지막 질문인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이 질문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7일 전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마 24:27~28)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고향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최후의 일주일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죠.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제사용 동물과 물품을 팔고 있는 어수선한 장사판을 둘러 엎으시고 성전을 청결케 하십니다.

제사장들과 논쟁을 벌이신 예수님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부하는 그들에게 결국 심판을 선고하고 성전을 떠나십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노하신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한 채 바보같이 성전이 얼마나 아름답냐고 감탄들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나 제자들이나 바라보는 주님은 한숨이 나오셨을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린 이 성전이 처참하게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가 없는 교회나 가정이나 개인에게서 주님은 떠나십니다.

제자들은 이 화려한 성전이 파괴될 것이란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로마군의 침략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처절하게 살육 당할 것을 상세하게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 사이 사이에 전 인류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을 섞어 놓으셨습니다.

실제 주님의 예언대로 주후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유대인 110만 명이 살육 당했으며 성은 불에 탔습니다.

그 많은 시체를 먹기 위해 검은 독수리 떼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 유일하게 남은 것이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우는 서쪽 벽 일부입니다.

그리고 말씀 가운데 섞여 있는 인류의 역사적 종말에 대한 예언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삶은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들을 절박한 마음으로,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자세는 삶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종말을 예상하고 하루하루를 살게 하소서. 아멘

2020년 2월 03일 성품묵상 - 유연성/권위

"유연성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에게 어떤 일을 시키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본 적이 있습니까?

어찌할지 갈등하고 있음이 얼굴 표정에 역력히 나타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시킨 일이고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순종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키우다보면 순종하기 보다는 거절당하는 경우를 더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가 종종 그 어린이와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서는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잠언 24:21)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권위를 존중하기가 왜 그토록 어려울 수 있는가? 존중하기 어려운 이유는 죄와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나는 예루살렘공의회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전통에서 벗어나는데 큰 분수령이 되는 장면입니다.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 15:19~20)

이 장면에서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개종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입니다.

'내 의견에는'이란 말은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권위적 입장에서가 아닌 조언자의 입장에서 말함을 뜻합니다.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나 의식법 준수가 결코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제안한 의견을 예루살렘 공회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야고보는 예수님 생존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공의회는 야고보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랐습니다.

예루살렘공의회가 야고보의 권위를 존중함으로 기독교 기반이 반석과 같이 든든해졌습니다.

인간은 첫 남자​와 여자​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로 반역​하고 반항​하는 경향​을 나타내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했습니다.

그 후​로 모든 사람​은 불순종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여호와​와 권위자들​의 인도​를 따르기 어려운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그처럼 불순종 아들들의 유전인자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모세의 형과 누이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들의 불평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모세 자신은 이방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심한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스라엘 대표자로 모세를 선택했으며 모세와는 “대면하여” 얘기하셨습니다

그에게 그분의 “온 집”을 맡겼음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그분은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그에 대한 대답이 없자 민수기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내린 형벌은 먼저 미리암에게 미쳐서 그녀는 나병이 들어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아론은 모세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권위는 존중돼야 합니다. 이 권위를 통해서 질서를 이루어 가십니다

권위의 순종은 평화와 질서를 가져오지만 권위의 부정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큰 불행을 가져옵니다.

유연성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한 사람은 권위를 존중함으로 평화를 이루어 갑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따르게 하소서. 아멘

2월 성품묵상

2월 성품묵상

🌳 월간성품 | 유연성 vs 저항
Flexibility VS Resistance

🌳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생각이나 계획에 애착을 갖지 않는 것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로새서 3:2]

🌳 그리스도의 명령 | “제자를 삼으라” 마 28:20

🎯 귄위자의 결정을 존중한다
🎯 변화를 예상한다
🎯 계획이 바뀌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 변화에서 좋은 점을 찾는다
🎯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 변화를 기회로 본다
🎯 조정한다
🎯 옳은 일을 굽히지 않는다
🎯 섬기는 자가 된다
🎯 어떤 일에 너무 집착 하지 않는다.

기독지성인의 삶 : 2월의 책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20세기 최고의 지성 C.S. 루이스가 쓴 우리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명료하면서도 지성적인 필치로 풀어넣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정통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 확연히 다가오는 책이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기독교 교리’가 보편적 수준의 인간에게는 얼마나 불합리한 논리인지 - 자유의지에 대해, 예정설과 이땅의 끝없는 고난에 대해 의문해 본 사람이라면 꼭 한번쯤 읽어야 할 책.

1편에 30여분이 소요되며 매주 순차적으로 2편씩 링크를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보내드리는 링크와 상관없이 개인의 스케쥴에 따라 들으시면 됩니다 ^^


[1편 듣기]
https://youtu.be/6VmGzrNubOQ

[2편 듣기]
https://youtu.be/efKX5CZm6y0

[3편 듣기]
https://youtu.be/as3PqOMGLh0

[4편 듣기]
https://youtu.be/bcPoUMMFpgQ

[5편 듣기]
https://youtu.be/DzXMUd7VBog

[6편 듣기]
https://youtu.be/9euXb7Jr1hc

2020년 1월 30일 성품묵상 - 책임/도둑

책임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 도둑이 아닙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훔치는 순간 `가슴 떨림`과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지요.

무의식적으로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이 얼마나 많은지..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것은 상대편의 시간을 훔치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남을 비방하는것은 그사람의 신용을 훔치는 것입니다.

필요없는 의자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것도 의자가 필요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입니다.

밥을 남기는 것은 배고픈 사람의 음식을 훔치는 것이며

차례를 지키지 않음은 차례를 지키는 사람의 `질서의식'을 훔치는 것이며

필요이상 넓은 집을 소유하는것은 집없는사람의 집을 훔치는 것이며

과소비 하는것은 근검절약하는 사람의 정성을 훔치는 것입니다.

없어도 될 차를 구입하는것은 차없는사람들의 쾌적하게 살 권리를
훔친 도둑입니다.

알고서 훔치는 도둑보다도 무의식 중에 훔치는 것들이 더욱 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병균들입니다.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도둑질 하지 말라의 근본적인 의미는 남의 재산을 존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만 하는 것으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의식적으로 죄와 반대되는 의무를 풍성히 행하려고 함으로 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즉 도적질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려 할 때' 더적질 하는 옛 습관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도적질은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불법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거짓 없는 부르심 안에서 근면하고 부지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선한 일을 하라"(28절). 근면은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를 유혹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책임감은 타인들과 하나님의 기대를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책임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알고 바로잡습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면 바로 잡게 하소서. 아멘
 

2020년 1월 28일 성품묵상 - 책임/과오

책임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차이가 있는 것 같은 두 개의 단어, 바로 경험과 체험입니다.

운전석 옆 좌석에 앉아서 운전수가 운전하는 대로 가면 자신이 어디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직접 운전해본 사람은 조수석에 앉아서 온 사람보다 훨씬 잘 기억합니다.

체험은 운전을 직접 하면서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의 남다른 고민과 길을 찾아가는 여정을 직접 몸으로 겪는 과정을 지칭한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많지만 재산 절반을 내 놓은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동일한 체험을 했어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인식 수준과 깊이, 깨닫는 교훈과 의미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체험은 특정한 개인이 특수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겪은 일이기에 보편적인 언어나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본인이 체험하는 과정에서 몸소 부딪히고 느낀 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체험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나 이삭을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을 체험해 가고 있습니다.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창 32:20~21)

라나님께서는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집으로 달아났던 에서를 만난게 하십니다.

에서에게 예물을 순차적으로 보낸 야곱은 밤에 일어나 최종적으로 아내와 자녀들과 나머지 소유들을 건네주고 홀로 남았습니다.

홀로 남은 야곱은 그 밤을 꼬박 새워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홀로 밤을 새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세운 것입니다.

이렇게 홀로 있는 시간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면하여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는 시간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만난 특수한 체험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돼 공감을 준다면 체험은 이제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마치 아이를 낳으면서 체험한 산통을 아이를 낳아본 체험이 없는 남자들에게 아무리 설명한들 남자들이 이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체험이 나에게는 누군가 체험한 경험으로 들릴 뿐일 것입니다.

`경험의 체험화`는 나만의 독창적인 지식을 특수화해 탄생하는 것이며,

`체험의 경험화`는 나만의 독창적인 지식이 일반화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체험으로 체화하지 않으면 먼발치에서 들리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체험 없는 경험은 공허할 뿐이고, 생각 없는 체험은 맹목일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특정인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사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개혁은 잘못을 뜯어고쳐서 바로잡는 것입니다. 야곱이 만난 하나님은 잘못을 바로 잡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회피하여 도망한 야곱을 에서 앞에 세워 그의 과오를 바로 잡게 하십니다.

기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의 과오를 바로 잡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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